[책&생각] ‘로동과 력사’…북으로 간 17개 언어 천재 김수경 평전
전쟁 통에 처자식과 헤어진 비극적 개인사도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l 푸른역사 l 3만원
남북한은 오랫동안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해방과 분단 이후 서로 다른 체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언어생활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두음법칙의 유무다. 이를테면 남쪽에서 ‘노동’ ‘여자’ ‘역사’라고 쓰는 것을 북에서는 ‘로동’ ‘녀자’ ‘력사’로 표기하고 발음한다.
남과 북 사이의 이런 언어 이질화에 맞서 2005년부터 진행돼 오고 있는 것이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이다. 2006년 편찬위원회 자리에서 북쪽 인사들은 두음법칙에 관한 북쪽 방침의 근거로 언어학자 김수경(1918~2000)의 논문을 제시했다.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중에서 개정할 몇 가지-기일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 두음 ㄴ 급 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1947년 6월 사흘에 걸쳐 ‘로동신문’에 실렸다. 1946년 8월에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의 창립 멤버이자 초대 도서관장을 맡은 김수경은 초창기 북한의 언어학과 언어정책의 중핵을 담당한 인물이다.
이타가키 류타 일본 도시샤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북한 언어정책의 토대를 세운 언어 천재 김수경의 삶과 업적을 다룬 평전이다.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서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를 사사했으며 해방 전에 이미 17개 언어를 습득했고, 도쿄제대 대학원(언어학 강좌)에 다니며 오구라 신페이의 지도로 조선어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수행한 김수경은 월북 이후에 훈민정음 창제일과 해례본 반포일이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 내 10월9일 한글날을 1월15일로 바꾸도록 했고, 북한 최초의 문법서인 ‘조선어 문법’(1949)의 초고를 집필하는 등 언어학자로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구조주의 언어학을 창시한 소쉬르의 주저 ‘일반언어학 강의’(1916)를 1928년에 세계 최초로 번역한 고바야시 히데오는 1940년 개역판 역자 서문에서 김수경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거명하며 개역판 출간에 기여한 데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 자신이 빼어난 어학 능력을 지녔던 고바야시는 김수경을 가리켜 “나는 내심 그의 끝없는 어학력에 혀를 내둘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은 김수경의 삶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전쟁 초기 북한 당국은 김일성대 교수들로 하여금 이남의 ‘해방지구’에서 정치 강습 등을 하도록 내려보냈다. 김수경 역시 남쪽 끝 진도에 파견되었는데,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황이 바뀌면서 귀환 지시를 받고 우여곡절 끝에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그사이 가족들이 그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어머니와 아내 및 자녀 4명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김수경은 1988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학술 행사에 참가했을 때 캐나다에서 온 둘째 딸과 비로소 만났고 이어서 평양에서 장남(1996년)·아내(1998년)와도 차례로 상봉했다. 북에 있는 아버지와 다시 만나고자 외국 이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간호학을 전공한 맏딸의 선택 덕분이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주인공의 곡절 깊은 생애를 한 축으로 삼고, 언어학자로서 그의 업적을 다른 한 축으로 삼는다. 책은 개인사를 시간순으로 좇은 역사 서술과 전문적인 내용을 담은 언어학 서술이 교차하는 구성을 지녔는데, 지은이는 이를 가리켜 ‘대위법적 평전’이라 이른다. 경북 상주 지역의 식민지 경험을 다룬 논문으로 도쿄대 대학원 문화인류학 과정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 부르며, 공적·사적 문헌과 통계는 물론 인터뷰와 전자우편, 사진, 영상 등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논의를 펼친다. 한국어판 서문 제목을 ‘이 책을 우리말로 읽는 독자들에게’로 삼고, ‘우리말’이라는 표현이 한국인만이 아니라 한국어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 이질적·복합적 가능성을 지닌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김수경은 1946년 5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지만, 그가 “식민지기에 사회주의자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해방 전에 나온 그의 유일한 언어학 저작은 서울에서 1945년에 인쇄한 ‘‘로걸대’ 제 판본의 재음미’로, 일제 말기에 아마도 학도병 동원을 피해 도쿄제대 대학원을 자퇴한 뒤 경성제대 조선어학연구실 촉탁으로 일하면서 규장각 장서를 섭렵한 결과를 담은 것이었다. 월북한 뒤인 1947년 진단학보에 실린 논문 ‘‘룡비어천가’ 삽입자음고’는 두 개의 어사를 잇는 삽입자음이 일본어 조사 ‘노’(の)에 해당하는 속격을 나타내는 문법적 기능을 지닌다는 주장(오구라 신페이, 최현배 등)에 이의를 제기하고, 조선어 음운의 동화작용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았다. 북쪽에서 발표한 논문들에서도 그는 구조언어학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경제사를 결합하는 방식을 이어 갔다.
김수경은 주시경의 제자인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김일성대 초대 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낸 김두봉의 후원을 등에 업고 한글 자모를 해체해 옆으로 나란히 쓰는 ‘가로쓰기’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예컨대 ‘감’을 알파벳처럼 ‘ㄱㅏㅁ’으로 풀어서 쓰는 방식으로, 타자기 개발 등의 기계화에 대비하자는 것이었지만 이 정책은 실행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남쪽 출신 인사들과 연안파 등을 대상으로 한 숙청 바람에 휘말려 196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20년 동안 언어학자로서 공식 활동을 하지 못했던 김수경은 1989년의 박사학위 논문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복권을 알렸다. 이 논문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신라어를 상이한 언어라고 주장한 이기문 등 한국 연구자들의 한국어 계통론을 비판하는 한편 남쪽 학계와 대화를 시도했다. 1968년 중앙도서관(인민대학습당) 사서로 ‘좌천’되면서 박탈당했던 김일성대 교수직도 1991년에 되찾았지만, 1995년에 뇌혈전으로 쓰러진 뒤 병마에 시달리다가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석 달여 앞둔 2000년 3월1일 여든두 해 가까운 굴곡진 삶을 마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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