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알립니다, 당신들의 아파트 벤치를 철거합니다

한겨레 2024. 2.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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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집 저 집 방문해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에 맞닥뜨렸던 장마철, 여자는 흠뻑 젖은 양말을 신은 채 남의 집에 들어가야 했다.

여자가 제 아이를 가르치는 학습지 교사의 청을 들어주지 못해 안쓰러워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직업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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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벤치

서유미 지음 l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문학동네, 2023) 수록작

여자는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을 보러 가거나 길을 걸을 때, 밥상을 차리면서, 여자는 종종 누군가를 떠올린다. 아이를 가르치러 오는 학습지 방문 교사이다. 지난번 방문 때, 교사는 아이 수업 시간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이전에 방문하는 집의 수업과 시간 차가 너무 나기 때문에 시간을 조금 당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게 넘어갔는데, 학습지 교사의 딱한 사정이 자꾸만 되살아나 여자의 일상을 맴돈다.

여자에게는 저녁 식사 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부를 산책하는 습관이 있다. 걸어 다니다 벤치에 앉아 일과를 마친 뒤의 여유를 즐기고 있으면 다른 동에 사는 여자가 나타나 옆에 앉는다.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란히 앉은 다른 동 여자는 맥주를 마신다.

아이스크림과 맥주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여성 둘이 고단한 하루를 살아낸 뒤 즐기는 잠깐의 여유이자 사치이다. 간격을 두고 한 벤치에 앉아 각자 좋아하는 먹거리를 먹는 두 사람은 몇 번 마주치면서 조금씩 친교를 쌓아나간다. 두 사람이 앉아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는 공간은 오래된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게시판에 나무와 벤치를 철거하겠다는 공고가 나붙는다. 모자라는 주차장을 확보한다는 명분이다.

소설은 아이를 키우는 한 여자의 일상과 일상 사이사이 연기처럼 피어나는 상념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극적인 사건이나 특별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의 일상이 흘러가듯 잔잔하게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잔잔한 일상의 틈새로, 계절·습기·풍경·냄새·소리·빛이 부드럽게 끼어들어 어우러진다. 여자는 과거에 자신이 만났던 사람과 머물렀던 장소, 자신과 타자들을 에워싸던 계절을 복기하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한순간, 여자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한 장면이 죽 펼쳐진다. 여자는 예전에 학습지 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이 집 저 집 방문해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에 맞닥뜨렸던 장마철, 여자는 흠뻑 젖은 양말을 신은 채 남의 집에 들어가야 했다. 당시 느꼈던 당혹감은 학습지 교사를 그만둔 뒤에도 불쑥불쑥 떠오른다. 여자가 제 아이를 가르치는 학습지 교사의 청을 들어주지 못해 안쓰러워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직업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학습지 교사라는 직업군의 애환을 그린다. 그런데 애환을 그려내는 방식이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주인공이 제 과거와 현재를, 타인과 자신을 오가는 패턴을 통해 학습지 교사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일들을 담담히 보여준다. 특정 직업군에 따르는 힘들고 불합리한 면만을 얘기하지도 않고, 그 직업을 성스러운 것으로 미화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반복되는 일과 만남, 그 가운데 부풀어 올랐다 사그라드는 감정을 유려하게 담아낼 뿐이다. 삶의 복합성과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스라한 연대, 그리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맑게 채색해 건네는 이 소설을 미술 작품에 비유한다면 한 편의 ‘수채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아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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