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도시의 정원사] 지루한 잔디밭서 각양각색 초원으로… 세계의 정원은 ‘진화 중’

박원순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실장 2024. 2.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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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양진경, 사진=ZinCo GmbH, David Berowitz

최근 몇 년간 세계적으로 강세를 띠는 정원 추세는 미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생물 다양성을 높일 수 있는 자연주의 정원이다. 특히 런던과 파리, 시카고와 뉴욕, 시애틀, 토론토에 이르기까지 세계 주요 도시의 공원과 광장, 회사와 상가, 옛 산업단지 등에 이런 정원을 많이 만들고 있다.

왜 이런 자연주의 정원 수요가 늘었을까?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변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생물 다양성의 중요함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인간 활동의 증가로 야생 서식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지구온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세계적으로 꿀벌을 비롯한 ‘수분 매개자(폴리네이터·pollinator)’가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도 눈여겨봐야 한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 벌과 나비의 40%가량이 멸종 위기라 한다. 지구 곳곳에서 살아가는 식물 종의 거의 90%가 이 폴리네이터들의 수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부양하는 생물 다양성 정원을 늘리는 일이 시급하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그레이트 딕스터(Great Dixter) 정원에서 발간한 생물 다양성 보고서는 매우 고무적이다. 정원을 주변 초원, 목초지, 삼림 지대와 비교해, 생물 다양성의 거점으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았는데, 결과적으로 이 정원의 다양한 서식지는 멸종 위기에 처했던 많은 곤충과 새의 활기찬 보금자리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한 녹지 면적이 아닌 질적 부분, 즉 큰키나무와 떨기나무, 여러해살이풀, 알뿌리식물 등 얼마나 다양한 식물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유형의 서식처가 제공되었으며 그러한 서식처가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도시 곳곳의 정원과 녹지 공간을 다양한 서식처로 이루어진 생물 다양성 거점으로 만들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다. 다행히 경관의 심미적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도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자연스러운 정원의 트렌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 잔디밭과 한해살이 꽃 위주의 인위적 화단보다는 더 다양한 식물이 혼합된 자연스러운 색상과 질감의 정원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물 다양성이 높으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주의 정원을 도시에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식물 군집에 대한 심층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식물 생태학과, 더 사려 깊고 예술적인 디자인의 접목을 통해 가능하다. 정원에 식물을 심고 가꾸는 일은 점점 더 과학과 예술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먼저 뉴욕시 맨해튼의 폐고가철도를 개조하여 도시의 녹지 공간으로 변모시킨 하이라인(Highline) 정원이다. 2009년 개장 후 단계적으로 2.3킬로미터 거리의 철도 주변에 조성한 이 정원은 세계적 자연주의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를 맡았다. 나무와 여러해살이풀, 알뿌리식물 등 식물 500여 종을 심었는데, 수십 년간 방치되었던 철도에 자라던 뉴욕 자생 식물 150여 종을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이다. 이 정원은 자생 식물에 외래 식물을 보완해주면 생물 다양성을 크게 높이면서 훨씬 더 긴 기간에 걸쳐 다채로운 꽃을 피우며 수백 종의 야생 벌을 비롯한 나비와 새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산업 유산과 자연이 교차하는 하이라인 정원은 도시 재생의 모범 사례로 꼽히며, 연간 800만명이 넘는 관광객과 다양한 폴리네이터를 끌어들여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잇는 소중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런던의 중심 주거 단지에 있는 바비칸 센터에 2015년 조성한 비치가든(Beech Garden)도 획기적이었다. 셰필드 대학교 조경학부에서 정원디자인을 가르치는 나이절 더닛(Nigel Dunnett) 교수 작품이다. 바비칸에 원래 있던 정원은 전형적 관목과 잔디, 일년생 꽃으로 구성된 다소 식상한 공간이었다. 계절에 따라 화단 꽃을 교체해주고 식수용 물로 물주기를 해주어야 하는 관리 집약적 정원이기도 했다. 더닛은 토양 깊이가 35cm 정도로 얕은 이곳에 초원에서 온 다양하고 매력적인 식물들을 자연스럽게 무리지어 심었다. 이들은 극단적 기후와 낮은 강수량에 잘 적응해 별도 물주기나 관리 작업이 거의 필요 없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지루한 정원은 이렇게 디자인한 초원으로 변한 이후 생물 다양성과 방문객 만족도를 크게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이절 더닛의 정원 설계는 도시 조경과 생태학적 지속 가능성을 결합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자연주의 정원 조성에 영감을 주는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앞으로 도시에 필요한 자연주의 정원은 생물 다양성과 미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충족하며 기후변화 적응성이 높고 지속 가능한 관리가 가능한 미래 지향적 정원이다. 남은 과제는 자생 식물을 기반으로 더 많은 정원 식물을 개발하는 일이다. 외국에 좋은 사례가 많지만 그 식물들이 모두 우리나라 기후에 최적화된 것은 아니다.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와 병충해에도 강한 경쟁력을 지닌 자생식물 품종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세종수목원에서는 정원 식물 품평회를 통해 더 많은 정원 식물 발굴 및 확산에 앞장서고, 자생 식물 품종 개발 및 보급을 지원하고 있다.

도시 공터, 주차장 주변, 아파트 단지, 학교, 야외 쉼터 등 곳곳에서 다양한 꽃이 계절마다 만발한다면 각종 곤충과 새에게 이롭고 그 꽃들을 보는 사람들의 행복 지수도 높아질 것이다. 또한 공공의 정원과 녹지 공간은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 현장으로서 중요한 공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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