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실험을 위한 20평대 아파트

리빙센스 2024. 2. 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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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나의 실험실

건축사사무소 바이아키텍쳐 김괄 디렉터에게 집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작은 실험실이다. 남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의 집에서 나눈 삶과 취향,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

시도와 실험을 위한 집

마른 가지로 계절을 지나고 있는 겨울 산을 바로 곁에 둔 언덕 위, 지어진 지 어언 50년이 지난 구옥 아파트에는 김괄 디렉터의 작은 집이 있다. 스스로 '실험실'이라 칭하는, 매일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실내의 천장 아래로 도시가스 배관이 지나가는, 오랜 세월만큼이나 구조도 독특한 집을 고른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성품 대신 집과 사람에게 어울리는 가구들을 직접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들이 주거 공간에 놓인 모습을 관찰하고 싶었어요. 일종의 실험실이 필요했던 셈이죠. 오래되긴 했지만 몰딩이 반듯한 벽에 흰색으로만 도배된 이 집이 마음에 들어요. 남산이 내다보이는 뷰도 이 집을 고른 이유 중 하나예요. 주택을 지을 때 부지 선정 단계부터 함께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이 뷰를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나부터 그런 집에 살아 보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집을 선택할 때도 뷰를 우선순위로 두고 결정했죠. 최소 1년 이상은 살아보면서 모든 계절의 변화를 직접 경험해 보겠단 마음으로요." 필요하다면 집을 짓는 과정에서 무엇이든 새로 만들어내는 그는, 익숙한 재료로 새로운 구조의 가구를 만들어내는 일을 즐긴다. 돌과 나무처럼 자연에서 온 재료라면 그 형태까지도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수평과 수직으로 깎아내는 대신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택한다. 직접 사용하고 공간 속에 적용해 보며 장단점을 데이터화하고, 클라이언트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제안하기 위해 집 안 곳곳에 두고 사용 중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뒤에 버려지는 자재를 활용한 것들이 많아요. 사이즈에 맞춰 잘라 낸 뒤 남은 석재나 나무기둥 같은 것들이요. 집을 짓는 데 쓸 수는 없지만 가구나 오브제를 만들기엔 충분한 크기들이거든요. 지금은 주로 석재를 사용한 실험적인 아이템을 만들어보고 있지만, 저희가 자주 사용하는 목재나 철제 같은 1차 가공제 안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1970년대에 지어진 20평대 아파트. 오래 살기보단 잠시 머물 생각으로 이사했지만 곳곳이 워낙 낡아 사비를 들여서라도 여기저기 손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후된 상태에서 괜히 큰 공사를 진행했다가 겪게 될 리스크에 대한 주위의 만류로 별도의 시공 없이 바꿀 수 있는 부분만 건드렸다고. 접착제 없이 사이즈만 맞춰둔 현관의 석재, 기존의 마룻바닥 위에 깐 카펫 타일 정도가 전부지만 집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두 곳을 손 본 덕에 작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직선적인 형태의 스틸 거울 역시 그가 제작한 것. 까시나의 마라룽가 체어 곁의 대리석 스툴도 남은 석재로 제작했다.
직접 제작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김괄 디렉터.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나만의 취향을 최대한으로 반영한 공간에 사는 것,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편안함과

안정감 같은 것들이 집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고 믿어요.

각각의 가구들이 마치 오브제처럼 놓여 있는 그의 집.
공사 후에 남은 석재로 직접 만든 선반.
간결하고 아름다운 가구만 놓아 둔 침실. 높고 긴 책장은 김기석 작가의 작품.

주인을 닮은 집

건축 설계 일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뚜렷한 취향이 없었다는 김괄 디렉터. 8년 차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야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그 안을 채우는 물건이 아니라, 집을 가꾸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의 취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늘 유목민처럼 떠돌며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집에 담는 일은 중요하다고 말이다.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시작한 지 10년쯤 된 것 같아요. 늘 스스로를 유목민이라고 생각하죠. 내 집 마련이 워낙 어려운 세상이라 매번 다른 집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하잖아요. 집이라는 곳이 마냥 편한 공간이 아니라는 게 아쉬워요. 하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나만의 취향을 최대한으로 반한 공간에 사는 것,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편안함과 안정감 같은 것들이 집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고 믿어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집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고요." 어떤 환경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지, 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집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는 김괄 디렉터. 그는 앞으로도 계속 실험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취향을 채운 집을 가꾸어 나갈 예정이다. 궁금증을 품게 하는 다음 집의 계획에 대한 물음에는 '나만의 집을 짓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답을 내리지 못했던 '좋은 집'의 정의에 대해선 지금의 집이 왜 그를 닮았는지를 알 수 있는 답을 내놨다. "공간만으로 근사한 집은 많지만, '이 집에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는다'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집은 흔치 않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좋은 자재를 쓰거나 독특한 구조를 지닌 집이 멋지다고 느끼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집보다 중요한 건 그 집에 사는 사람 같아요. 집이 그 집에 사는 사람과 닮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집, 그게 진짜 좋은 집 아닐까요?"

CREDIT INFO

editor장세현

photographer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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