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의 서가] 지방 천재문인들의 작품집, 고전문학에도 `탈중앙`

박영서 2024. 2. 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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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고전학 총서 10종
하우현 외 지음 / 김승룡 등 기획 /
지만지 한국문학 펴냄

지난 2022년 8월 우리 문학사 최초로 지역 고전학 총서를 발간해 화제를 모았던 부산대 김승룡 교수 등이 1년 6개월 만에 다시 내놓은 2차 지역 고전학 총서 10권이다. 이번 총서는 여말 선초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다양한 시대적 인물들의 작품을 담았다. 영호남과 경기·강원에서 활동했던 학자들이 지은 작품들이다. 한시(漢詩)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5언 율시와 7언 절구, 일기와 놀이 기록까지 다양하다.

'경봉 시집'은 양산 통도사의 선승 경봉(鏡峰) 정석(靖錫)의 시를 소개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대선사였던 경봉은 한국 시승의 계보를 이으며 경허 스님 이후 불가 한시 영역의 대미를 장식했다. 다양한 소재를 다룬 시에는 선(禪)적 깨달음의 근원은 물론, 깊은 한문학 소양이 드러난다. 일지(日誌)에 수록된 시를 있는 그대로 소개해 미화나 왜곡 없이 작품의 본질을 살필 수 있다.

'신당일록'은 16세기 퇴계학파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가 1588년 1월 28일부터 1592년 9월 28일 사이에 178일간 쓴 일기다. 진솔한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 사대부의 과거에 대한 생각과 당대의 과거 제도, 여행길의 고달픔, 지역 선비의 일상생활, 도산 서원과 청량산 유람기, 임진왜란과 의병 모집 기록 등 평범한 16세기 조선 청년 학자의 삶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예암 시선'은 18세기 학자 예암(豫菴) 하우현(河友賢)의 시 77제 128수를 소개한다. 하우현은 진주 수곡면 사곡 마을에 진양 하씨 터전을 처음 잡았던 석계(石溪) 하세희(河世熙)의 현손이다. 남명학을 계승한 그는 과거 시험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해 치지(致知)를 학문의 요체로 삼고 이를 위해 항상 마음속에 경(敬)을 간직하고자 했다. 시에는 당대 지식인의 고뇌와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열상 기행 절구'는 옥파(玉坡) 신필영(申弼永)의 한강 기행시다. 그는 1846년 성묘를 위해 서울 두모포에서 남한강을 거쳐 고향인 경기도 지평을 다녀오면서 7언 절구 100수의 연작 기행시를 썼다. 기행시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한강 일대의 역사·문화 경관, 빼어난 산수 풍경, 친교를 맺은 인물들과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정회(情懷), 향촌의 일상 등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조선 후기 죽지사(竹枝詞)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태재 시선'은 여말 선초의 학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5언 율시 125제 153수를 소개한다. 그는 가화(家禍)로 인해 기나긴 유배 생활을 했으나 고려 말 시학의 전통을 계승해 조선 초 문단을 진작하고 한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서거정, 권남, 한명회 같은 탁월한 제자들을 길렀다. 시에는 유배지에서의 아픔과 그 가운데서도 잃지 않았던 '한(閒)'의 정서가 잘 드러난다.

이 밖에도 경남 함양의 선비 진우재(眞愚齋) 양황(梁榥)이 임진왜란 당시 전황의 급박함과 민중의 고초, 젊은 선비의 우국충정을 그린 '용만분문록', 1757년 성리학자 자고당(紫皐堂) 박상절(朴尙節)이 선조들의 기록을 모아 시화를 곁들인 '기락편방', 17세기 영남학파 학자 무첨(無첨) 정도응(鄭道應)의 '무첨재 시선', 18세기 호남 선비 황윤석의 시 100제를 수록한 '이재 시선 2', 근대 유학자 경와(敬窩) 엄명섭(嚴命涉)의 시 127제 157수를 담은 '경와 시선' 등은 한문학과 지역 문학 연구에 상당한 가치가 있는 책들로 평가된다.

저자들의 문중에서도 총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우현의 7대손인 진양 하씨 대종회 하동준 이사는 "선조들의 기품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시선집이 출간돼 기쁘다"면서 "후손들의 귀감이 되도록 문중에 널리 알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시리즈는 단순히 각 지역의 문화 자산을 발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학문적으로 축적해 다음 세대에게 더 다양하고 균형 있는 문화를 전승함으로써 지역 고전학의 초석을 닦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지역 고전학 총서를 기획한 김승룡 교수는 "누구도 관심 두지 않던 지역 고전을 발굴해 출판하는 일이 매우 힘겨웠다"면서 "지역 고전학을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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