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수소를 뽑아내자…무한한 ‘천연수소’ 향한 골드러시[딥다이브]
‘땅을 파면 천연수소가 펑펑 나온다. 아마도 무한대로 계속 생성될 거다.’
이런 얘기, 어떤가요. 웬 허무맹랑한 소리냐고요? 틀림없는 사기꾼이라고요?
최근 유명 과학저널 사이언스지와 미국 지질조사국 같은 신뢰할 만한 기관과 과학자들이 이 스토리를 진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천연수소, 지질학적 수소, 백색(White)수소, 골드(Gold)수소 등. ‘지각에서 자연 생성되는 수소’를 일컫는 용어도 참 여러가지인데요. 어쩌면 세상을 바꿀 발견일지 모르는 천연수소를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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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상식 깬 천연수소
보글보글, 동굴 안에 고인 물속에서 기포가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프랑스 그로노블알프스대학 연구진이 2월 9일 자 사이언스지를 통해 공개한 영상인데요. 활발하게 방출되는 이 기체의 정체는 바로 수소(H₂)입니다.
‘탄화수소(석유나 천연가스)를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수소는 이미 산화되어 연료로 사용할 수 없다. 결합되지 않은 풍부한 수소를 얻고 싶다면,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태양 표면이다.’ 2007년 보수 색채의 미국 잡지 ‘뉴 아틀란티스’는 ‘수소 사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지적했죠. 외계가 아닌 지구에선 수소를 얻으려면 복잡하고 값비싼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수소가 어떻게 미래의 에너지원이 되겠냐는 비판이었습니다.
수소 골드러시가 시작됐다
땅속에서 수소가 관찰된 건 꽤 오래전부터입니다. 100여년 전인 1921년 호주 지질학자들이 남부의 한 광산에서 높은 농도(80%)의 수소를 발견한 기록이 남아있고요. 냉전시대 구소련 과학자들이 지각 속 수소 발견과 관련해 남긴 연구기록은 500건이 넘죠. 튀르키예 안탈리아의 올림포스산에서 2800년 동안 꺼지지 않고 있는 신비의 불꽃 ‘야나르타쉬’ 역시 천연수소 존재의 증거입니다.
다만 아무도 수소를 찾아내려 애쓰지 않았죠. 돈이 된다고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동안은 석유나 천연가스를 찾으려고 땅을 파다가 실수로 수소를 발견하는 식이었습니다. 수소는 무색무취잖아요. 작정하고 달려들지 않는 한 매장지를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는데요.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미 미국·호주·캐나다·스페인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들이 실제로 수소 시추를 시작했습니다. ‘수소 우물’을 파고 있는 곳은 미국 네브래스카주와 캔자스주, 아프리카 말리의 부라케부구, 호주 남부 민라톤 근처, 스페인 피레네 산맥 기슭 등이죠. 이밖에 브라질, 콜롬비아, 오만에서도 천연수소가 발견됐고요. 프랑스 연구자들은 알자스-로렌 탄광지역을 유력 매장지로 보고 탐사 중입니다.
지금의 이 열기는 딱 ‘수소 골드러시’라 부를 만합니다. 대규모 수소 매장지를 남들보다 먼저 찾아내기 위한 돌진이 시작된 거죠.
그중 눈에 띄는 선구자 중엔 말리 출신으로 지금은 캐나다 스타트업 하이드로마(Hydroma)를 운영 중인 알리우 디알로가 있습니다. 그는 말리의 시골마을에서 1987년 우연히 발견됐다가 버려졌던(저주받았다고 여겨서) 수소우물을 2012년 개발했죠. 거기서 나온 수소는 마을의 전기 공급원이 되고 있습니다. 말리에서 이미 24개의 수소우물을 시추한 그는 이렇게 확신합니다. “수소는 인류의 게임체인저입니다.”
“전 세계 천연수소 매장량 5조t”
자, 그런데 좀 냉정하게 따져보자고요. 아직까지 수소 시추는 꽤 리스크가 커 보이는 사업입니다. 일단 수소가 어디에 얼마나 많이 묻혀있는지,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얼마나 땅을 깊이 파야 하느냐에 따라 경제성 차이가 크죠. 현재 시추 중인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수소우물은 이미 3400m를 팠지만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시추의 안전성은 보장되는 건지, 기존 화석연료 시추방식을 그대로 쓸 수 있는지도 짚고 넘어가야 하고요. 기왕 뽑아낼 거라면 수소의 생성양을 자연 상태보다 확 늘릴 방법도 고안해 내야 할 겁니다.
아마 실제 지하에서 천연수소를 대량으로 뽑아내서 이걸 시장에서 판매하게 되기까진 수년이 걸리겠죠. 그래도 일단 분위기는 긍정적입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서 천연수소 프로젝트를 이끄는 제프리 엘리스 박사가 17일 미국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서 미발표 연구결과를 미리 공개했는데요. 이에 따르면 전 세계 지하에 최대 5조t의 수소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5조t이라니, 잘 와닿지 않는데요. 그는 “이 중 몇 퍼센트만 회수하면 연간 5억t에 달하는 모든 예상 수요를 수백년 동안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발이 불가능한 매장지도 많지만, 전체의 2~3%만 개발해도 전 세계 수소 수요를 충족시키기 충분할 거란 겁니다.
170년 전 석유시대도 그렇게 열렸다
땅속에 파묻힌 보물 같은 수소를 찾기 위한 무한 경쟁. 참 영화 같은 스토리인데요. 이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운 건 과거 석유시대 개막과 참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석유가 있긴 있었죠. 하지만 암석층 틈으로 흘러나오는 걸 모으는 수준이었습니다. 땅을 드릴로 뚫으면 땅속에서 석유가 펑펑 솟아나오지 않을까. 당시로선 몽상에 가까운 이런 생각을 한 모험가 중 하나가 에드윈 드레이크였습니다. 그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펜실베이나주 타이터스빌에서 1년 넘게 땅을 팠죠. 투자금이 바닥나기 직전, 그는 최초로 석유를 시추하는데 성공해냅니다. 1859년 근대적 석유산업의 시작입니다. 이로써 고래기름은 등유로 대체됐고 포경산업은 순식간에 쇠락합니다.
고래기름에서 석유로의 전환이 알려주는 것은? 뉴욕타임스의 16년 전 기사 속 표현을 빌리자면 “한 시대의 대체 불가능한 에너지원이 다음 시대의 유물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새롭고 깨끗하고 적합한 에너지원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한순간에 대체될 수 있는 거죠. 그럼 다음번엔 혹시 그게 수소일 수도 있을까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하나 알아둘 점은 그 석유 유전을 처음 개발한 에드윈 드레이크의 그 이후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전 개발로 약간의 돈을 벌었지만 결국 말년엔 무일푼으로 잊혀지고 말았죠. 결과적으로 동시대에 미국의 ‘석유왕’이 된 건 석유를 뽑아내는 시추업자가 아니라 석유를 정제하는 정유업자 록펠러였습니다.
어쩌면 천연수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금이야 누가 더 빨리 시추에 성공하느냐를 두고 경쟁하지만 빨리 간다고 진짜 승리자가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참고로 쉘, BP, 셰브론 같은 대형 에너지 기업은 아직 수소 시추에 뛰어들지 않은 채 관망 중입니다.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그들이 나선다면 판도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요. By.딥다이브
천연수소와 관련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현재까지 확인된 점 중 하나는 발견되는 곳이 석유나 천연가스와 겹치지 않는다는 거죠. 솔직히 그래서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땅속 깊은 곳엔 석유 말고 수소도 묻혀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발생된 천연수소가 세계 곳곳에 매장된 것이 확인됩니다. 생산과정에서 탄소배출이 거의 없어 친환경적이면서도 생산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는 수소입니다.
-천연수소 시추에 뛰어드는 스타트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소 골드러시의 시작입니다. 빌 게이츠가 지난해 투자한 콜로마처럼 막대한 투자를 유치하는 곳이 생겨났습니다.
-미국 지질조사국은 지각에 매장된 천연수소가 5조t에 달한다고 봅니다. 이 중 아주 일부만으로도 전 세계의 수백년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양입니다.
-하지만 정말 경제성과 안전성이 보장될 수 있을까요. 상업화까지 가려면 수년은 더 걸릴 텐데요. 과연 고래기름을 대체했던 석유처럼, 천연수소가 새로운 에너지 시대를 열게 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상상력으로 많은 부분을 채워야하는 단계입니다.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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