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인생] “시골살이가 삶도, 음악도 풍성하게 해줬죠”

황지원 기자 2024. 2. 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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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인생] (22) 포크 가수 박강수씨 <전남 담양>
어머니 간병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코로나19로 공연 끊기며 정착 시작
카페운영·유튜브 방송 덕 인기 얻어
팬들과 소통하며 지역 홍보효과도
박강수씨가 창평면으로 귀촌해 차린 카페 겸 작업실. 전국에 있는 팬들이 박씨를 만나러 이곳에 온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카페 ‘소통’은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장소가 되고 있다. 소통의 주인장인 포크 가수 박강수씨(51)를 만나기 위해서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인근 고서면에서부터 멀리 완도에서 배를 타고 온 사람까지 다양한 곳에서 방문한 팬들이 소통의 장을 가득 메웠다. 박씨 덕에 창평면을 알게 된 팬들은 마을을 산책하고 인근 식당에 방문해 지역경제에도 만만치 않은 도움을 준다.

2001년 1집 ‘부족한 사랑’으로 데뷔한 박씨는 지난해 11월 KBS ‘인간극장’에 출연해 귀촌 생활을 공개했다. 창평면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박씨의 노래와 가족에 대한 사랑은 많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으며 그의 전성기를 열었다. 방송이 나가고 얼마 안돼서는 하루에 50명 이상이 그의 카페를 찾았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박씨는 10살 때 가족과 함께 창평면으로 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이곳을 떠나게 됐다.

“인근 인문계 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붙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입을 하나라도 덜려고 기숙사가 있는 산업체 부설학교에 보냈죠. 그땐 다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성인이 되고서는 대학 입학금을 벌려고 서울로 향했다. 호프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노래를 불렀고, 주인에게 ‘무대에서 노래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의받게 된다. 어린 시절 팝송 한번 들어본 적 없던 그는 노래를 잘한다는 얘기도 처음 들었다. 종일 서빙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노래로는 30분 만에 받을 수 있다니 무대에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포크 가수 박강수씨는 코로나19로 서울을 떠나 유년을 보낸 전남 담양군 창평면으로 귀촌했다. 창평면에 남아 있는 옛 담벼락은 그가 만드는 유튜브 노래 콘텐츠의 무대가 된다.

라이브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던 박씨는 자신의 노래를 담은 앨범을 발매하며 음악활동을 펼쳐나갔다. 2011년엔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여자포크싱어상을 수상하며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지금까지 발표한 정규 앨범만 9장. 히트곡 ‘가을은 참 예쁘다’를 비롯해 150곡이 넘는 노래를 모두 그가 직접 작사·작곡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부드러운 음색 덕에 그의 음악을 찾는 사람이 늘어갔고 ‘박강수 노래 모음’은 유튜브 조회수 180만회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가 말기 암으로 살날이 1년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이다. 박씨는 28년 만에 창평면을 다시 찾아 어머니 간호에 매진했다. 그의 정성에도 어머니는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전에 너무 고통스러워하셔서 일찍 돌아가신 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어요. 이곳에 있으면서 서울에 공연하러 다니기가 쉽진 않았지만, 그때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더라면 평생 후회로 남았을 거예요.”

어머니를 보낸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연이 모두 중단된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세 들어 살던 방을 정리하고 오빠가 있는 창평면으로 향했다. 그는 과거 라이브카페를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카페를 차렸지만 코로나19가 유행하던 때 시골에 낸 카페가 잘될 리 만무했다. 그는 드립백 커피를 택배로 배송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무대를 놓을 수 없었던 박씨는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다. 창평면의 논과 들, 나무, 기와 담벼락을 배경으로 노래하는 영상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가 모르는 새 창평면 홍보대사 역할도 하게 된 것이다. 창평면에 온 게 온전히 그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농촌 생활은 음악활동에 좋은 영향을 줬다.

“서울에 살면서 음악으로 만들 만한 소재가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졌어요. 농촌에 살며 느끼는 여유와 노랗게 익은 벼, 바닥에 떨어진 홍시, 푸른 하늘은 음악을 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맹위를 떨쳤던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박씨도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매주 단독 공연을 열고 지역축제에서도 관객을 만나고 있다. 문화생활에서 소외되기 쉬운 지방 사람들을 살뜰히 챙긴다.

가수 일이 바빠지며 카페 운영은 캄보디아에서 온 올케에게 맡겼다. 결혼이민여성인 올케가 한국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보는 경험을 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공연이 없는 날엔 카페로 나와 업무를 보며 팬들을 반갑게 맞는다. 카페를 연 것 외에도 창평면에서 그의 직업이 하나 더 늘었다. 바로 오빠 박강규씨(56)의 농사일을 돕는 것이다. 창평농업경영인회장을 맡고 있는 박씨의 오빠는 면 전체 논 가운데 대리경작을 포함해 4분의 1을 경작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농민이다.

박씨는 지난해엔 추수를 마친 나락을 1t 트럭에 실어 옮기는 일을 했다. 올핸 지게차 작동법도 배울 생각이다.

“앞으로도 농촌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노래를 써나갈 거예요. 농사도 더 열심히 짓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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