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삼의 인생 이모작…한 번 더 현역 <45> 안창수 화백

고영삼 인생이모작포럼 공동대표 2024. 2. 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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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역천(靜思力踐), 무엇을 할 것인지 깊이 있게 모색하라.

그는 어떻게 하여 내면의 보석을 뒤늦게 찾게 된 것일까? 어떻게 하여 잠재 능력을 이토록 영글게 할 수 있을까? 경남 양산에 있는 작업실을 방문한 날 선생과 앉은 자리에는 평생의 내조자 권민자 여사도 함께했다.

-선생님의 기질도 영향을 미쳤겠죠? DNA가 천재성을 뒷받침하면서 독특한 화풍으로 연결되었겠군요.

안 화백은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에도 출연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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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예순에 처음 잡은 붓…中·日 동양화 대회 상 휩쓸다

- 한국수출입은행 58세 정년퇴직
- 닭띠해 맞아 닭 그림 그려봤더니
- 솜씨에 주변 경탄하며 유학 권유

- 홀로 중국행…온종일 그림 매진
- 체중 10kg 줄고 대상포진 앓아
- 6개월 만에 외국인 대전서 입선

- 2년 뒤 부동산 팔아 日 유학까지
- 日교육용 화집에 작품 실리기도
- “재능만으로 안돼, 실천이 중요”

◇ 안창수의 인생Tip

- 정사역천(靜思力踐), 무엇을 할 것인지 깊이 있게 모색하라. 그 후엔 모든 힘을 다해 실천하라

호랑이 독수리 닭의 그림을 즐겨 그리는 안창수 화백이 자신이 그린 호랑이 그림을 배경으로 파안대소하고 있다.


인간의 잠재 능력. 이건 정말 가늠하기 힘든 것 같다. 여기 정년퇴직 후 내면의 꿈틀거리는 예술성을 뒤늦게 일구어 또다시 비상하는 이가 있다. 그는 육십 평생 몰랐던 소질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평생을 연마하던 사람 이상이다. 설파(雪波) 안창수(79) 화백. 그는 어떻게 하여 내면의 보석을 뒤늦게 찾게 된 것일까? 어떻게 하여 잠재 능력을 이토록 영글게 할 수 있을까? 경남 양산에 있는 작업실을 방문한 날 선생과 앉은 자리에는 평생의 내조자 권민자 여사도 함께했다.

-책이 매우 많아 여느 화가의 작업실과 다르군요.

안창수 화백이 갑진년 용의 해를 맞아 독자들에게 좋은 기를 품어주는 청룡 그림을 그렸다.


▶천 권이 넘습니다. 80% 이상이 중국 그림서입니다. 15%가 일본 책이고요. 두 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림의 이론도 계속 공부하기 위해 가져온 것입니다. 화가는 그림만이 아니라 철학과 이론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합니다.

-정년퇴직 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부산고, 연세대를 나와 한국수출입은행을 다녔습니다. 2003년 58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대우조선 고문을 끝으로 쉴 겸 고향 양산으로 왔죠. 우연히 시작해 지금 20년이 넘었네요.

안창수 화백은 금융기관을 퇴직하고 본격 화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그의 성취는 아무리 봐도 예사롭지 않다. 퇴직 후 시작한, 평범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대가의 경지다.

-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는데 지금도 해외 활동을 하시나요?

▶저는 중국 일본에서 수상을 많이 했죠. 중국에서는 중화배전국서화예술대전 금상 등을 받았고 일본에서는 일본전일전 준대상 등을 받았지요. 현재 일본전국수묵화미술협회 무감사, 국제중국서법국화가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짧은 세월 대가의 경지에 도달하셨는데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퇴직 후 고향에 와서 이곳저곳 소요하며 불교와 유교 경전을 읽기도 하고 붓글씨를 하기도 했죠. 그러다가 닭띠해가 왔기에 닭 그림을 그려보았는데 아, 사람들이 칭찬하며 심지어 중국으로 가서 정식으로 배우면 대성할 것이라는 말까지 하더군요. 그러던 중 마침 동의대 교수로부터 정보를 받아 중국 절강성 항저우로 갔죠. 항저우 중국미술대학교는 중국 남종화의 본산이거든요.

-그 나이에 평생 하지 않던 분야를 공부하는 유학이라니 놀랍군요. 중국에서는 어떻게 공부하셨나요?

▶저는 은행 다닐 때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어요. 그래서 해외에 나다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고 그래서 가보자는 결심을 쉽게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사실 대학에 도착했으나 머리가 허연 사람을 이상하게만 보더군요. 그래서 이곳저곳을 일주일 정도 기웃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인사하게 된 중국 교수에게 휴대폰에 담긴 저의 그림을 보여줬죠. 그랬더니 등록일을 살짝 넘긴 날인데도 미술대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전문코스에 등록할 수 있게 해주더군요. 천운이었습니다.

-가족 없이 혼자서 그림 공부를 하신 건가요? 60이 넘어 낯선 땅에서 힘들지 않았나요?

▶제가 한번 하면 지극히 몰입합니다. 애초 6개월 정도 공부하려 했지만, 그냥 빠져들어 2년 동안 두문불출했어요. 아파서 살이 10㎏나 빠지고 했어도 목적의식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고생스럽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담당 교수께서 “청나라의 대표 화가이며 서예가인 금농(金農)은 50여 살 때 시작해 경지에 올랐고, 미국 최고 민속화가 그랜드마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es)는 78세에 시작해 101살까지 1600여 작품을 그린 국민화가가 되었다”며 저를 격려하시더군요. 마음 흔들릴 틈이 없었습니다.

대화를 해보니 안 화백은 목표를 잡으면 좌고우면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는 2년을 꼬박 좁은 기숙사, 학교 식당, 강의실을 오갔다.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부터는 빈 강의실에서 밤늦게까지 몰입했다. 하루 종일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손에 쥐가 나고 목과 몸이 굳어버리기도 했단다.

-그렇게 배운 성과가 있었겠지요?

중국에서 첫 수상한 사실을 보도한 잡지 표지.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닭 그림으로 중국 호모배 외국인 전국서화대전에서 입선했죠. 그것은 우리나라 KBS에 해당하는 중국 CCTV에 방영되었어요. 그 다음 해에는 호랑이 그림으로 임백년배 전국서화대전 1등상, 독수리 그림으로 중화배 전국서화예술대전 금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틈엔가 2년이 지났더군요. 그림을 배우고 확신감도 가진 2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미안했지만 이왕 하는 김에 뿌릴 뽑자고 생각했죠.

-뿌릴 뽑는다고요?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일본은 동양화에 있어서도 국제적 교류가 더 활발하죠. 한국의 동양화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왔지만, 당시 한국에는 중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한·중·일 3개국에서 인정받고 싶었어요. 중국에서 공부하고 2007년 일본으로 갈 때 눈물이 엄청나게 났어요.

-왜 눈물이 난 건가요?

▶중국화를 공부한 제가 다시 채색과 기법이 다른 일본화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거죠. 감격의 눈물이었어요. 그 눈물은 저를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다시 치열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더군요. 그 덕분에 저는 전일본수묵화수작전에서 예술상과 준대상,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외무대신상을 받는 등 여러 공모전에서 10개 정도의 상을 받았어요. 2011년에는 일본 수묵화 교육용 화집에 저의 작품이 실렸을 만큼 인정을 받았어요.

이 정도라면 우리는 비범함을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나이 60에 시작했는데 동양화의 본 향인 중국과 일본에서 그토록 상을 휩쓸다시피 하다니. 그는 과연 처음부터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에게는 애초 그림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나 봐요?

▶어릴 때 관심이 있었지만 평범한 추억일 수 있어요. 예술만이 아니라 무엇을 하건 기본 재능이 있어야죠. 재능이 있으면 빠르게 성장하죠. 하지만 재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집념과 불굴, 꾸준한 실천이 핵심입니다. 중국에서 공부할 때는 대상포진에 걸려 아내가 한국에서 약을 가져오는 등 고생하면서도 2년 동안 잠자는 시간 외 모든 시간에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62세에 일본에 갈 때는 비용이 없어서 노후 준비용 부동산을 처분하기도 했었죠. 높은 성과는 깊은 집념과 노력의 소산입니다. 재능과 스승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지만 본인이 노력해야 두각을 나타내는 경지에 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기질도 영향을 미쳤겠죠? DNA가 천재성을 뒷받침하면서 독특한 화풍으로 연결되었겠군요.

▶당연하죠. 외유내강형의 저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정사역천(靜思力踐). 제게는 깊이 생각하되 벼락같이 행동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저의 내면에 60년 동안 모른 채 깊이 박여있던 그림 재능은 중국으로 번개같이 날아가 밥 먹고 자는 시간 외 모든 시간을 매진하는 저의 기질에 의해 비로소 빛을 본 것이죠. 저는 붓놀림이 아주 빠릅니다. 제가 그동안 20회의 개인전을 했는데 모두 그 영향입니다.

-앞으로 꿈은요? 은퇴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세계 무대에 가서 한국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군자 위주로 정체된 감이 있는 우리나라 수묵화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습니다. 은퇴하시는 분들은 다시 도전하는 청년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30년 이상 세월이잖아요. 호기심을 가지고 뛰쳐나가야죠.

안 화백은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에도 출연한 적 있다. 은퇴 후 열정이 더 솟아났다. 그런 그의 그림은 수묵을 바탕으로 하지만 일반 동양화와 다르다. 일단 채색을 입혀 밝고 화려하다. 전통적인 남종 문인화에 있는 운필과 채색법에 서구적인 조형법 같은 터치가 융합되어 있다. 또한 호랑이 독수리 닭 그림으로 중국에서 상을 휩쓴 바 있는 그의 그림은 모두 기가 세고 오묘하다. 청룡의 해 변화의 시대인지라 그의 화폭 속에 담긴 청룡은 곧 인생 2막 출발자의 미혹함과 주저함까지 단박에 부숴버릴 기세다.

※특별후원: BNK 금융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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