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바디올로지] 엉덩이는 늘 기대를 배반한다

이유진 기자 2024. 2. 2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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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_엉덩이
남의 손길이 엉덩이에 닿는 일은 극과 극의 체험을 낳는다. ‘궁디팡팡’은 지친 마음에 힘을 준다. 사랑을 나눌 때의 손길도 마찬가지다. 반면 원치 않는 순간 엉덩이에 닿는 손길은 강렬한 수치심과 분노를 유발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뼈에 붙은 근육과 살덩어리로 이뤄진 엉덩이는 사람이 직립 자세로 서고, 걷고, 앉을 수 있게 한다. 그 기능만큼이나 중요하게 외모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사랑과 훈육, 지지와 성원, 그리고 폭력이 깃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엉덩이는 문화적 아이콘이다. 일본 동화 ‘엉덩이 탐정’ 주인공은 아이큐가 1104에 이르는 추리 천재로 냉정함을 잃지 않으면서 수수께끼를 해결해나간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출마 선언 직전 사회연결망서비스(페이스북)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엉덩이 탐정 닮았다고 함’이라고 적어 올릴 정도로 한국에서도 화제를 몰고 왔다. 일본 만화 ‘짱구는 못 말려’ 주인공 짱구는 걸핏하면 엉덩이를 까고 영악하게 춤을 추면서 어른들을 교란시킨다.

극장판 ‘엉덩이 탐정’ 한 장면.

엄격한 자녀 훈육으로 유명한 프랑스인 부모 아래 짱구가 살았다면 아마도 볼기짝을 여러 대 얻어 맞고도 남았을 것이다. 프랑스는 아버지가 자식을 감옥에 보내는 게 가능했을 정도로 강력한 체벌 훈육의 역사를 지닌 나라로, 그 체벌 훈육의 상징이 엉덩이 때리기였다. 자녀의 엉덩이 체벌 금지법이 통과한 건 2019년 7월에 이르러서였다.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1926년 ‘아기 예수의 엉덩이를 때리는 성모’를 발표한 뒤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로서 파문당했다. 작품 속 성모는 팔을 높이 쳐들어 아들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풀 스윙으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다. 아기 예수의 엉덩이는 빨갛게 물들어 있고 어찌나 놀랐는지 후광은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엉덩이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공포심을 배우는 부위일지도 모른다.

남의 손길이 엉덩이에 닿는 일은 극과 극의 체험이다. 격려하는 뜻에서 엉덩이를 토닥이는 손길, ‘궁디팡팡’은 지친 마음에 힘을 준다. 사랑을 나눌 때의 손길도 마찬가지다. 반면 원치 않는 순간 엉덩이에 닿는 손은 강렬한 수치심과 분노를 유발한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의 최대 변수라 할 정도로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는 2013년 콜로라도 주 덴버시 펩시 센터에서 연 팬미팅 현장에서 엉덩이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 어느 남성 라디오 디제이가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그의 엉덩이를 움켜쥔 것이다. 소송전이 벌어졌고 스위프트가 이겼지만 피해자는 법정에서 수도 없이 ‘엉덩이’ ‘볼기짝’이란 단어를 써야만 했다. 스위프트는 “승소하고도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 과정이 너무 치욕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이후 스위프트는 페미니스트 가수로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극단적인 다이어트도 관두었다. “충분히 말랐다 싶으면 모두가 좋아하는 엉덩이가 없고 엉덩이를 위해 살을 찌우면 배가 나온다”며 스위프트는 “(여성의 몸에 관한) 말이 안 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있다”고 말했다.(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스 아메리카나’ 가운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1814년작, 그랑드 오달리스크. 오달리스크는 ‘터키 궁녀’를 뜻하는 오달릭에서 온 프랑스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간 주류 문화가 만든 ‘이상적인 엉덩이’는 서구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시선이 다분했다. 프랑스 좌파 언론인 ‘리베라시옹’ 출신 저널리스트 장 뤽 엔니그가 1995년 지은 책 ‘엉덩이의 재발견’은 성애의 엉덩이 문화사를 집대성했다. 겉으로 근엄한 척하는 사회에 던지는 직설적인 ‘19금 성담론’으로 후련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젊은 여성의 엉덩이만을 대상으로 했기에 한계가 뚜렷한 책이었다. 반면 이 책은 합리성에 기반했다고 주장하는 서구 근대과학의 허구성을 반증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책에는 마릴린 먼로의 ‘육체의 비밀’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보면, 92-57-85㎝라는 마릴린 먼로의 가슴둘레-허리둘레-엉덩이둘레 치수를 모두 합하면 234, 즉 2-3-4라는 연속적 수열이 된다고 했다. 퍽이나 미학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다.

근대 이후 가난한 비서구의 주민들은 ‘비인간’이었고 서구의 수탈 대상이 되었다. 앞서 이 연재물에서도 소개했던 17세기 ‘문신의 왕자’ 지올로와 19세기 다모증 여성 훌리아 파스트라나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서구 사회는 티없이 매끈한 피부와 제모를 문명화의 요소로 간주했다. 엉덩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구 백인보다 큰 엉덩이는 전근대, 비문명의 상징이었다.

파리 사람들이 사르키 바트만을 관찰하고 있다. 사르키 바트만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814년 그린 그림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올로와 파스트라나 등 18~19세기 유럽을 떠돌며 공연한 여러 ‘희귀 인간’ 중에서도 바트만은 굴욕적이고도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인근 감투스강 근처 초원에서 태어난 바트만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부족 간 분쟁 틈바구니에서 아버지와 약혼자를 잃었다. 서구인들은 그를 ‘호텐토트의 비너스’라 불렀다. 호텐토트는 유래가 정확하지 않은 멸칭으로 비서구 전근대 ‘미개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트만은 서구 백인보다 큰 엉덩이를 가진 까닭에 과학적 제국주의와 인종학 사업에 동원되었고 공공장소에 전시되고 공연했다. 특히 그의 커다란 둔부는 음탕함의 상징으로 둔갑해 비상한 관심을 끌어모았다. 살아 생전 바트만은 자신의 엉덩이와 성기의 크기를 측정하려는 백인 남성 과학자들의 ‘줄자 공격’에 강력히 저항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바트만이 사망한 뒤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장례식도 없이 그의 시신은 자연사박물관으로 이송돼 박물학자 조르주 퀴비에의 칼날에 낱낱이 해부당하고 샅샅이 측정되었다. 언론은 신체를 중심으로 인종차별적 근대 담론을 생산해온 과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 의기양양하게 기사를 쏟아냈다. “(사망 뒤에도) 뚱뚱하고 거대하게 돌출된 이 여자의 둔부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200년이 지나서야 바트만의 시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땅에 묻힐 수 있었다.

니콜라스 위에가 그린 사르키 바트만. 둔부를 특히 부각시켰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르키 바트만’을 쓴 영문학자이자 저술가인 레이철 홈스는 바트만의 존재가 과학적 인종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했다. 여성의 엉덩이를 강조하는 일은 인종차별과 관련되었다.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도 자유롭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 시절 백인 보수 논객들은 미셸 오바마가 살이 쪘다며 그의 엉덩이를 연신 들먹였다. 명백한 인종차별적 비난과 모욕주기였다.

근대 이후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 여성들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엉덩이가 납작하다며 인터넷에서 종종 ‘종특’(종족 특성, 비하하는 말)이라 비난받았다. 지금도 서구·남미 여성들의 엉덩이 크기와 모양에 견줘 보잘것없고 납작한 한국 여성의 엉덩이 비교 사진들을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여성의 엉덩이에 관한 대중적 관심이 급격히 높아진 건 1990년대 중후반부터였다. 1994년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감독 장선우)에서 등장한 ‘엉덩이가 예쁜 여자’ 캐릭터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는데 마침 성형수술 기술 또한 대대적으로 발전했던 때이기도 했다.

1990~2000년대 성형외과 전문의들은 여성들의 엉덩이 사이즈와 모양을 결정하는 전문 담론을 대거 생산했다. 한국 여성의 엉덩이를 4개 유형으로 나누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고, 바트만의 둔부 측정 결과를 과학자들에게 그대로 듣고 받아적었던 그 옛날 서구 언론의 본이라도 받듯, 한국의 주요 언론도 대부분 비판 의식 없이 그대로 이런 류의 의견을 받아쓰기 했다. 2010년대 초중반 ‘애플힙’이란 콩글리시 신조어까지 낳은 ‘예쁜 엉덩이’ 열풍은 미성숙한 여성 아이돌의 주류 이미지를 ‘섹시 걸그룹’으로 바꾸었다. 방송사는 여성 아이돌의 허리와 엉덩이를 측정해 승패를 겨루도록 했다.

프랑스 여성 미술가 앙젤리크 베그가 그린 자화상. 엥그르 오달리스크에서 영감받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갖가지 엉덩이론을 펼쳤던 엔니그의 말처럼, 지금은 남자들의 엉덩이도 시선의 제물이 되는 시대다. 엉덩이를 볼록하게 만들어주는 속옷인 ‘엉뽕’은 남성용도 함께 팔려 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적인 엉덩이론에 가장 강력히 포섭된 이들은 젊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뒤태가 괜찮은지, 월경혈이 묻지는 않았는지 수시로 거울에 비춰보고 만져보고 살펴봐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엉덩이는 늘 기대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중력은 힘이 세고, 의술은 세월을 꺾지 못한다.

엉덩이 근육이 힘내는 법을 잊어버린 ‘엉덩이 기억상실증’이 요즘 화제다. 앉으나 서나 엉덩이는 큰 구실을 한다. 흔들면서 춤출 때, 높은 곳에 오를 때, 걷거나 뛰어다닐 때, 일할 때,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 엉덩이는 가벼워야 한다. 끈기 있게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공부할 때도 엉덩이 힘이 필요하다. 동그랗고 탄탄한 엉덩이에 열광하는 만큼이나 축 처진 엉덩이를 안쓰럽게 여기는 것, 그것은 또 왜 사랑이 아니겠는가. 어떤 엉덩이든 사랑받아 마땅하다.

이유진

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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