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인 척 이제 그만! 성실한 소인으로 즐겁게 살아봅시다"

조태성 2024. 2. 2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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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중국 풍도 '소인경' 번역
군자-소인 관계 뒤집어 해석한 소인들의 경전
"거창한 도덕적 대의명분, 삶의 걸림돌일 뿐
할 일 열심히 하는 소소하지만 정확한 삶이 중요"
인문연구모임 문이원의 문현선(왼쪽부터), 최영희, 박지영, 문영희씨가 1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국내에서 처음 번역 소개한 '소인경'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박시몬 기자

"군자는 당파를 만들지 않아 화를 당했을 때도 도와줄 사람이 없지만, 소인은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대하므로 발생하는 이익을 보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도덕과 정의를 지키지 못했다고 징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화를 당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반드시 곤경에 처한다."

동양문화권에서 최고의 인간형으로 꼽히는 군자를 두고 불편부당해서 되레 화를 당하기 쉽다 하고, 삿된 무리 잘 만드는 소인이 편히 살기엔 더 좋단다. 이렇게 허를 찌르며 큭큭 웃게 만드는 문장이 가득한 책을 쓴 사람은 누굴까.

논란의 중국 정치가 풍도(882~954)다. 풍도는 당나라 멸망 이후 중국 대륙이 5대10국이라는 대혼돈기에 빠졌을 때 4개 왕조에서 10명의 황제 아래 50여 년의 관직생활을 하며 그중 20여 년을 재상으로 지냈다. 당대엔 오래 즐겁게 산 노인이라 해서 장락노(長樂老), 절대 쓰러지지 않는 늙은이라 해서 부도옹(不倒翁)이라고도 불렸다. 요즘엔 '중국의 JP(김종필)'로도 꼽힌다. 물론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던 성리학의 시대엔 혹평을 면치 못했다.

그 풍도가 죽을 때 꼭 남기고 싶다 한 책이 바로 소인을 위한 경전 '소인경(小人經)'이다. 풍도의 책, 그것도 소인경의 번역은 처음이다. 최영희(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박지영(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문현선(세종대 소프트웨어융합학부 초빙교수), 문영희(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강사) 4명으로 구성된 인문연구모임 문이원의 작품이다.

인문연구모임 문이원이 처음 번역한 소인경. 박시몬 기자
10년 단짝들의 공동번역 작업

-문이원을 간단히 소개한다면요.

최영희 : "각자 박사학위를 끝내고 허탈함이 왔어요. 중국 공부를 함께 해 보자 해서 모임을 만들었죠. 공자가 말한 무문이불원(無文而不遠), 즉 '글로 남기지 않으면 멀리 가지 못한다'는 말에서 따서 문이원이라 지었어요."

문현선 : "2014년 1월에 시작했는데 처음엔 일주일에 3, 4일을 만날 정도로 서로 붙어 살았어요. 황석공의 '소서'나 왕응린의 '삼자경'처럼 알려지지 않은 책을 번역, 소개해 왔고 소인경은 일곱 번째 책이에요."

-크고 거창한 군자보다 작고 깔끔한 소인이 요즘 트렌드에 맞는 것도 같은데요.

박지영 : "처음엔 우리 얘기 같았어요. 지금도 괜찮아, 충분히 잘 살고 있어라고 위로해 주는. 박사를 한 지금도 어른들은 늘 '언제 교수 되니' 물어보시거든요. 그러다 보면 교수 아니면 나는 계속 목표 미달 인생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이 책을 만나 '나도 충분히 잘 살고 있구나' 안도하게 됐어요. 개인적으로는 무척 특별한 책입니다."

최영희 : "'동양 고전 읽기' 수업 때 학생들에게 일부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군대 다녀와서 책이 나왔냐고 물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몰라 괴로운 청년들에겐 굳이 거창할 필요 없이 매일 최선을 다하면 괜찮다는 메시지가 위안을 주는 것 같아요."

간신배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풍도

-풍도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간신배인가요.

박지영 : "풍도가 늘 재상일 수 있었던 건 황제가 바뀌어도 백성은 그대로라 봤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백성을 보고 정치를 하니 바뀐 황제도 풍도를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문현선 : "현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급변했잖아요. 풍도야말로 변화하는 세상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이라 보는지, 풍도 관련 책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어요."

문영희 : "사실 처음 책을 접하고 좀 혼란스럽긴 했어요. 군자면 군자, 소인이면 소인인데 이 책은 그걸 뒤흔들어 버리니까요. 소인경의 원문은 1,500자 남짓인데 번역은 엄청 힘들었어요."

인문연구모임 문이원의 박지영(오른쪽 두 번째)씨가 '소인경'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서문에서 번역에 6년이 걸렸다고 했는데요.

최영희 : "소인경 내용을 체화하는 데 걸린 시간이에요. 소인으로 살자는 게 아무렇게나 살자는 얘긴 당연히 아니지요. 짧은 구절 안에 담긴 속뜻을 찾아내서 쉽게 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박지영 : "아무래도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한 '먹물'이다 보니 글자 그대로 하나하나, 조금도 다르지 않게 풀어내다 나중에 과감하게 현대적으로 풀어보자고 했고, 몇 번 책을 갈아엎었죠."

소인이면 뭐 어때, 지금 필요한 정신

-가장 와닿은 구절을 하나씩 뽑아 준다면요.

문영희 : "제일 마지막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요. 어쨌든 나름대로 공부한 것을 살려서 열심히 살아남았으니까 나는 강한 거구나, 위안이 돼요."

박지영 : "1장에 나오는 '어째서 군자에는 미련을 두지 않으면서 소인으로 불리는 것을 유독 두려워하는가'예요. 군자 되는 게 어렵다면 '소인이면 뭐 어때'라고 해야 해요. 우리 모두 군자가 아니면서 여전히 군자이길 바라고 소인이면서 여전히 소인이 아닌 척하는 게 아닌가 되돌아봅니다."

최영희 : "서문에 써둔 '군자는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 숨고 소인은 난세에서도 살아남아 성공한다'가 좋아요. 군자는 좋은 사람이니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짠 나타나서 해결해줘야 하는데 군자는 숨어요. 결국 문제를 풀고 세상을 바꾸는 건 소인들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줍니다."

문현선 : "이 책을 남기면서 풍도는 '이 책을 읽고 아는 사람은 얻는 게 있을 것이고 이 책을 읽고 욕하는 사람은 욕할 것인데, 그 또한 그대로 놔둬라'라고 해요. 저희가 최대한 열심히 해도 무엇을 얻는가는 결국 보는 사람들의 몫이구나 싶어요."

인문연구모임 문이원이 내놓은 '소인경'. 박시몬 기자

-이 책 덕분에 해 본 '소인 짓'이 있다면요.

문영희 : "사소한 건데, 이 책 나오고 처음으로 고교 동창 단톡방에다 이 책 사달라고 알렸어요. 예전엔 그런 일 절대 못했거든요. 의외로 친구들이 또 수월하게 사주더라고요. 내가 이 책을 썼으니까 이런 것도 하는구나, 내가 좀 변화하고 있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문현선 : "맞아요. 우리가 부탁하는 방법을 너무 몰라요. 군자는 손을 벌리지 말아야 된다, 군자는 약한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이런 교육을 받아가지고.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할게요."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문이림 인턴 기자 yirim@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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