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제가 바보”…코로나가 앗아간 남편, 파탄 난 가정 [코로나 4년, 안녕하지 못합니다]

김세훈 기자 2024. 2. 1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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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발 코로나19 집단감염’ 피해자 전모씨(51)가 지난해 2월 7일 서울 송파경찰서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 참석해 경찰의 수사 지연을 규탄하고 있다. 쿠팡노동자의건강한노동과인권을위한대책위원회 제공
꼭 4년 전인 2020년 2월2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사망자가 나왔다. 그후 3만6000명(지난해 8월 기준)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등졌다. 유례 없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고강도 방역정책이 이어졌고, 정부는 지난해 5월 공식적으로 코로나19 유행 종식을 선언했다.
엔데믹(풍토병화) 선언으로 ‘일상으로의 전환’이 공식화됐지만, 코로나19로 시민들이 입은 생채기는 다 회복되지 않았다. 감염병이 남긴 질문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경향신문은 코로나19 국내 첫 사망자 발생 4주기를 맞아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코로나19가 전방위로 퍼지던 2020년 5월24일. 쿠팡 물류센터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계약직으로 일하던 전모씨(51)의 일상도 이날을 기점으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오후 조였던 전씨가 센터로 출근했을 때 작업장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관리자가 직원들을 일렬로 세우고 몇몇 사람을 불러냈다. 누군가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는데 셧다운(시설 전면폐쇄) 안 해도 되느냐’고 묻자 관리자는 “구청에서 소독을 끝냈다. 이름 부른 사람은 집에 가서 쉬든지 보건소에서 검사받으라”고 했다. 전씨는 그제서야 물류센터에서 코로나 확진자 2명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부천시 보건소가 확진을 통보한 시각은 오전 9시 전후였지만 회사는 이를 일부 노동자에게만 알렸다. 즉각적인 폐쇄 조치도 없었다. 추가 확진자가 있겠다는 생각이 전씨의 머리를 스쳤다. 퇴근 직전 관리자에게 확진자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감염됐는지 물었지만 “호명되지 않은 분들은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답만 들었다.

현실은 달랐다. 이틀 후 전씨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8시간쯤 뒤 남편 A씨(58)와 딸도 확진됐다. 전씨는 “가족에게 기저질환이 없고, 미·후각 소실 외에 별다른 증상이 없어 잘 이겨낼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남편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바이러스가 폐로 전이됐다는 사실이 정밀 검사에서 확인됐다. 가족들은 격리돼 영상통화로 안부를 물었다. 6월7일 “남편의 상황이 좋지 않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전원 통보 4시간 전에도 남편이 영상통화로 ‘나는 괜찮은데 당신과 딸은 괜찮냐’고 물었다”라면서 “믿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A씨는 ‘급성호흡부전으로 인한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

“평소 식당·통근버스 이용 않던 내가 왜 코로나에…병상 누운 남편 모습 낯설어”
코로나 확진 전 전모씨(51)과 남편 A씨의 모습(왼쪽사진)과 코로나 확진 뒤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A씨의 모습(오른쪽 사진) 본인 제공.

전씨는 자신이 코로나 환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감염을 걱정해 통근버스와 탈의실, 외부 식당 등을 이용하지 않았다. 감염 가능성이 있는 동선과 장소를 하나씩 지우니 물류센터 냉동창고가 남았다. 전씨는 “창문이 없어 전혀 환기가 안 되고, 일하는 사람끼리 어깨가 닿을 정도였다”면서 “옆에서 일하는 사람도 수시로 바뀌어 누가 누구인지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당장 병상에 누운 남편을 돌봐야 했다. 남편의 패혈증 증세는 2~4주 간격으로 악화와 호전을 반복했다. 상급종합병원과 요양병원을 옮겨 다니며 전씨의 마음도 무너져내렸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머리를 밀고, 콧줄을 꿴 남편 모습은 낯설었다. 시간이 지나자 얼굴 근육이 변형되면서 입술이 오그라들었다. 딸은 바뀐 아버지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전씨는 딸의 면회를 막았다. 그는 “남편 목의 가래를 5분마다 한 번씩 빼줘야 하니 거의 잠을 못 잤다. 자책도 많이 했지만 딸 생각과 ‘나마저 포기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했다.

주변의 시선도 두려웠다. 감염병을 향한 공포와 혐오가 극에 달했던 때였다. 전씨는 “당시 확진자는 세균처럼 여겨졌다”면서 “완치 후에도 2021년 이사하기 전까지 낮에 돌아다니지 않았다”고 했다.

집단감염 피해자들과 쿠팡에 책임 인정 촉구…민·형사 소송은 지지부진
쿠팡 부천물류센터에서 일하다 코로나19에 집단감염된 피해자들이 지난 2020년 12월29일 쿠팡을 상대로 집단민사소송을 서울동부지법에 제기하기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전씨는 2021년 3월 ‘쿠팡이 노동자에 대한 안전의무를 위반했다’며 소송을 냈다. 잠시나마 희망도 있었다. 2022년 6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 부천지청은 쿠팡 측이 작업중지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했다는 혐의에 대해 ‘일부 기소’ 의견으로 인천지검에 송치했다. 전씨는 투쟁이 끝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진척이 없었고, 전씨가 낸 민사 소송도 지지부진하다. 가정은 파탄 났다. 간병비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집을 팔았다. 인천에서 경기 안산으로, 안산에서 수서로 월셋집을 옮겨다녔다.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의 인생도 뒤틀려 버렸다. 직장 두 곳에서 면접 요청을 받았지만 코로나 확진으로 가지 못했다. 평소 살갑게 지내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쓰러진 것은 마음 속 멍울이 됐다. 딸은 코로나 완치 후에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전씨는 “딸이 한 달 전까지 우울증약을 복용했다”면서 “나와 남편은 그렇다 쳐도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딸마저 이렇게 되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전씨도 2022년 이후 허리 통증이 심해져 일을 쉬고 있다.

지난 2020년 8월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쿠팡발 코로나19 피해자 지원대책위원회 등 시민단체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쿠팡 물류센터 내 코로나19 감염에 대해 쿠팡의 사과 및 작업환경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씨는 “4년 동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회사는 사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쿠팡에서 걸렸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와 같은 2차 가해성 발언을 법정에서 들어야 했다”면서 “금방 마무리될 줄 알았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고 밝혔다.

조혜연 쿠팡대책위 활동가는 “집단감염 피해자들 일부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고, 주변 시선이 두려워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꺼려 했다”면서 “그나마 모인 사람들끼리 회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싸워왔는데 시간이 길어지니 동력이 떨어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쿠팡 측은 “2020년 5월24일 첫 확진자 발생 뒤 당국과 협의해 방역과 폐쇄 조치를 했으며 다음날 사업장을 전면 폐쇄했다”면서 “당시 동선을 숨긴 확진자의 역학조사 방해행위로 감염자의 확진 사실이 지연 통보된 것”이라고 해명혔다.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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