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코드의 무덤’…보험사는 왜 그 병원의 의료자문을 선호했나
보험사, 보험금 지급 중단
자문 병원 20곳 중 2곳에
의료자문 건수 37% ‘쏠림’
‘특정 병원에 집중’ 의혹
자료 요청엔 “공개 못 해”
[주간경향] 설 연휴를 이틀 앞둔 지난 2월 7일. 발달지연을 겪는 자녀를 둔 A씨가 경찰서를 찾았다. 며칠째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작성한 고소장과 관련 증거를 꺼내 잠시 확인했다. 피고소인은 현대해상화재보험 의료비심사부의 B씨와 모 보험손해사정업체 직원 C씨. 그러고 보니 B씨와 C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B씨와는 자녀의 ‘의료자문’ 문제로 통화만 했다. 현대해상의 위탁을 받아 의료자문 전 현장심사 업무를 대행한 C씨와는 안면이 한 번 있을 뿐이었다.
B씨 신상정보로 현대해상 사무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다. C씨에는 개인연락처, 그리고 ‘기타사항’란에 ‘20대 중후반 외모’라고 적었다. 공무원 신분인 그가 경찰서에 고소장을 써들고 찾아간 건 난생처음이다. 변호사를 구할 형편은 못 된다. 제대로 쓴 건지도, 고소하는 게 맞는가도 싶지만 다른 길이 없다. “내용이 너무 장황해 5번이나 읽었어요.” 경찰이 살짝 핀잔을 주며 접수증을 내줬다. 접수증을 손에 쥐고 돌아오는 내내 아픈 아이 생각을 했다.
‘의료자문’ 후 치료비 지급 중단
자녀(2017년 9월생)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확인한 건 유치원에 입학시킨 뒤인 2021년 9월이었다. 2022년 4월 거주지였던 지방의 한 신경과의원에서 언어, 인지, 대소근육, 감각통합 등 전반적인 발달지연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인 2017년 3월 현대해상 태아보험(실손보험)에 가입했던 게 큰 힘이 됐다. 언어치료, 행동치료 등 월 200만원가량의 치료비를 보험금으로 충당했다.
치료는 효과를 봤다. 치료 시작 전인 2021년 9월 을지대학병원에서 검사할 당시 A씨 자녀는 ‘언어이해’나 ‘전체지능’ 등에서 전반적으로 ‘매우 낮음’이 나왔다. 본격적인 치료 시작 1년여 뒤인 2023년 7월 건양대병원 동일 검사에서는 ‘언어이해’, ‘전체지능’ 등이 ‘평균 이하’ 수준으로 높아졌다. 신경과의원 부설 치료센터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한 언어지연 검사 결과도 ‘13개월가량 지연’에서 ‘7개월가량 지연’으로 나아졌다.
치료에 희망을 품던 A씨에게 2023년 7월 현대해상이 보험금 지급을 보류한 채 현장심사를 요구했다. 현장심사는 보험사들이 보험금 지급이 적합한지를 판단하기 위해 벌이는 ‘의료자문’의 전 단계다. 심사를 통해 미심쩍다고 판단되면 의료자문이 진행된다. 당시 이미 현대해상은 발달지연 아동 보험금 미지급 문제를 놓고 여러 가입자와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A씨도 현장심사가 내키지 않았다. 수락하지 않으면 보험금 지급이 보류된다는 말에 심사를 수용했다.
현장심사에 필요한 가입자 동의를 받고, 서류 구비업무 등을 진행한 담당자가 바로 보험손해사정업체 직원 C씨다. C씨는 진료 및 검사 기록 열람을 요구했다. A씨는 자녀가 장기간 치료받던 신경과의원 부설 치료센터, 건양대병원 검사기록 등의 열람 동의서를 써줬다. 같은해 10월 현대해상 측이 전해온 현장심사 결과는 ‘의료자문 진행’이었다. 현장심사 과정에서 C씨는 A씨 자녀의 건양대 검사기록을 현대해상에 전달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이 문제 등을 들어 현장심사 무효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대해상은 지난해 12월 한 종합병원에서 의료자문을 강행했다. 자문 결과 나온 진단명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상 ‘언어발달장애(코드기호 F80)’였다. 현대해상 보험약관에는 의사로부터 ‘장애’ 진단을 받은 가입자(보험수혜자)에겐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면책조항’이 있다. 현대해상은 의료자문 결과를 들어 결국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렇게 작년 7월부터 최근까지 부지급된 보험금이 1700여만원이다. 보험금 없이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A씨는 올 1월 자녀의 치료 횟수를 기존의 절반으로 줄였다. 이사 등으로 비용지출이 더 커진 2월에는 자녀의 치료를 중단했다. A씨는 “의료자문 과정이 불투명하고 결과도 납득하기 어렵다”며 여러 차례 문제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벼랑 끝에 선 A씨가 찾아간 곳이 경찰서다. C씨를 보험업법 위반 및 배임 혐의로, B씨를 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자문의는 대면진료 없이 “발달장애” 판정
국내 모든 실손보험에는 ‘의료자문’ 조항이 약관에 있다. 보험사기나 보험금 과다청구, 이로 인해 발생하는 타가입자들의 피해와 과잉진료의 폐해, 보험사의 재정건전성 악화 등을 방지하기 위한 조항이다. 과거 도수치료나 백내장 수술 과잉 등의 사례로 실제 필요성이 입증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의료자문이 보험금 지급을 회피할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와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의료자문에 대한 법적 규제도 없고, 의료자문의 모든 절차를 사실상 보험사가 주도하기 때문이다. 우려가 계속되자 금융감독원과 보험업계는 2021년 자율지침격인 ‘의료자문 표준내부통제기준’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고 기준 자체도 보험사에 유리하게 마련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발달지연 아동의 경우 ‘누가’ 의료자문의 대상이 되는지부터 불분명하다. 국내 어린이보험 점유율 1위인 현대해상에 의료자문 대상 선정기준을 묻자 “아동의 치료일지나 검사기록 등을 내부적으로 검토한 뒤 의료자문 진행 여부를 결정한다”며 “검토 과정에는 손해사정사나 전직 간호사 등이 참여한다”고 밝혔다. 의료자문 대상이 되는 아동들은 기존에 다니던 병원 의사로부터 ‘발달지연(R62·R49)’ 진단을 받아 보험금을 받아왔다. 현대해상 설명에 따르면 ‘의사가 내린 진단’에 대해 손해사정사나 전직 간호사 등이 의문을 제기해 의료자문 대상에 올린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의사가 내린 진단’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대해상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때 역시 ‘의사가 내린 진단’인 의료자문 결과를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현대해상은 “의사의 진단이라 해도 발달지연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한방병원, 정형외과 등에서 진단을 받거나 보험금 지급 판단에 필요한 검사나 치료기록이 누락된 사례도 많기 때문에 손해사정사 등을 통한 검토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보험가입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필요한 모든 서류 등을 갖춰 대상을 정하는지도 의문이다. A씨의 사례처럼 심사 단계에서 중요한 검사기록이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의료자문 과정도 투명하다고 보기 힘들다. 보험사들은 일명 ‘의료자문위탁기관’에 의뢰해 의료자문을 진행한다. 위탁기관이 의료자문단 풀(Pool)에 들어 있는 종합병원 전문의에게 의료자문을 받은 뒤 결과를 보험사와 보험가입자에게 통보하는 방식이다. 보험사들은 제3자에 해당하는 위탁기관이 의료자문을 벌이기 때문에 보험사의 ‘입김’이 자문 과정에 반영될 여지가 없다는 입장이다. 밖에서 보는 시각은 다르다. 의료자문에 필요한 수수료나 전문의에게 지급되는 자문료 등을 보험사들이 모두 부담하기 때문이다. 현대해상의 경우 현재 10곳의 위탁기관을 지정해 의료자문을 맡기고 있는데, 이중 학술단체에 해당하는 대한정형외과학회를 제외한 9곳이 민간 의료컨설팅 회사다.
한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보험사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컨성팅 업체가 정말 공정하게 의료자문을 진행할지 의문”이라며 “자칫하다가는 ‘보험금을 주지 않기 위한’ 목적의 의료자문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험손해사정사는 “의료자문 표준내부통제기준에서 ‘의료자문 실시 대상’ 관련 가이드라인을 주고 있음에도 보험사 임의대로 의료자문을 남발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가입자 입장에서 볼 때 현행 의료자문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제도라고 보기 힘들다”고 밝혔다.
발달지연의 경우 의료자문을 맡기는 병원과 전문의의 전공을 놓고도 논란이 일고 있다. 발달지연 진단은 의사라면 누구나 내릴 수 있다. 연관성이 높은 전공만 봐도 소아청소년과, 이비인후과, (소아)신경과, (소아)정신과, 재활의학과 등 다양하다. 발달지연 자체가 워낙 광범위한 원인에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달지연 전문 클리닉 등을 운영하는 종합병원이나 전문병원 중에는 각 분야 전공의 3~4명이 협진을 통해 진단과 치료를 하는 곳도 많다. 그럼에도 보험사의 발달지연 의료자문은 ‘정신과’ 전문의에게 치중돼 있다. 현대해상의 경우 아예 정신과 전문의에게만 의료자문을 받는다. 이유를 묻자 “발달지연 문제에 있어선 정신과가 가장 자문에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의료자문 독립성·객관성 보장되도록 개선해야”
의료자문이 특정 병원에 집중된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손해보험협회의 ‘의료자문 현황 공시’ 자료를 보면 현대해상의 경우 2023년 상반기 중 전체 20곳의 종합병원 정신과에서 발달지연 의료자문을 받았다. 이들 병원에 의뢰된 총 자문 건수(정신과)는 607건이다. 여기에는 발달지연 외 다른 정신과 질환 자문도 일부 포함돼 있다. 607건 중 37%에 해당하는 225건이 특정 병원 두 곳(각 158건·67건)에 집중됐다. 공교롭게도 이 두 병원은 현대해상과 보험금 미지급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가입자들이 의료자문만 하면 보험금 면책에 해당하는 장애판정이 나온다고 해서 일명 ‘F코드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곳들이다. 발달지연아동권리보호가족연대 관계자는 “의료자문을 받는 발달지연 아동 중 상당수는 재활의학과 등 정신과 외 전문의에게서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온 아동도 많다”며 “현대해상이 왜 정신과에만 자문을 넣는지, 특정병원에 왜 자문이 몰리는지 등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가족연대 등은 의료자문을 하는 전문의가 ‘환자’에 해당하는 아동을 직접 진료하지도 않고 치료일지나 검사기록 등 서류만 보고 판정을 내리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중이다. 자문을 맡은 전문의조차 “대면 진료를 하지 않은 판정 결과로, 법적 효력이 없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이를 근거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보험사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간경향은 현대해상에 발달지연 아동 의료자문 의뢰 건수와 이에 따른 보험금 부지급률 자료를 공개해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현재 손보협회에 공시 중인 현대해상의 의료자문 현황자료에는 의뢰 건수나 부지급률 통계가 개별 질병이나 질환별로 구분돼 있지 않아서다. 현대해상은 “관련 데이터가 워낙 많고 복잡해 취합이 어렵다”며 자료공개를 거부했다.
2022년 기준 국내 실손보험 가입자는 4000만명에 육박한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실손보험 불만 건수는 2017년 961건에서 2022년 3205건으로 3배 이상 늘었다. 보험사가 의료자문을 실시하는 건수도, 자문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부지급률’도 증가추세에 있다. 실손보험이 국민건강보험에 이어 제2의 의료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의료자문에 대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험연구원은 2023년 10월 발간한 연구보고서 ‘의료자문제도 현황과 과제’를 통해 “최근 들어 보험회사의 의료자문 결과에 대해 보험소비자가 민원·소송을 제기하는 등 의료자문과 관련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며 “미국이나 호주 등과 같이 민간보험에도 독립적인 민간기구나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이 개입해 자문 절차를 마련하고, 의료진의 참여를 독려해 독립적인 자문의 선정이 가능한 환경 및 제도적 기반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박양동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 이사장은 “결국은 발달지연 아동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부모들이 민간 실손보험에 치료비를 의존하다 보니 생기게 된 문제”라며 “근본적으로는 건강보험에서 발달지연 진단과 치료에 대한 급여지원에 나서는 등 근본적인 의료체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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