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개비를 붓 삼아 탄생한 풍경화 한 폭…장욱진 회고전의 ‘무제’

노형석 기자 2024. 2. 1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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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
1979년 장욱진 작가가 성냥개비 붓에 잉크를 묻혀 그린 ‘무제’. 윤광조 도예가의 경기도 광주군 작업실 주변 풍경을 단박에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아,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제가 왔습니다. 그날 기억하시죠? ”

한국 현대 분청사기 도예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윤광조(80)는 스승이자 대선배인 장욱진(1917~1990)의 갱지 그림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되뇌었다. 서울에 함박눈이 내린 지난달 17일 오후였다. 최근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몸이 불편한데도, 작업실이 있는 경북 안강에서 부러 차를 타고 와서 부슬부슬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장욱진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덕수궁 경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들어왔다. 그는 1전시실 안쪽 벽에 내걸린 한 점의 그림과 한 점의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45년 전 장욱진이 벌인 멋스러운 붓질 퍼포먼스를 떠올렸다.

눈앞에는 열개를 겨우 넘는 선으로 그린 산과 강물결, 그 안의 새와 물고기들, 기와집, 술상을 두고 앉은 두 사람, 자동차 등을 소박하게 그린 ‘무제’가 있었다. 그는 회상했다. “저 그림은 성냥개비로 만든 붓에다 만년필용 잉크를 묻혀서 그린 겁니다. 제 작업실과 그 주변, 선생과 함께 식사 자리의 풍경을 담았지요. 전시장에서 내내 황홀했어요. 그때 그림을 그리게 됐던 인연의 풍경들이 어젯일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광주 윤광조 작업실에서 성냥개비 붓으로 풍경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욱진의 모습을 찍은 사진. 당시 그와 함께 윤광조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간 김형국 전 서울대 교수가 콘탁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1979년 8월 어느날, 혈기방장한 30대 도예가로 활동하면서 경기도 광주군 초월읍 지월리 산골에 막 작업장을 마련한 윤광조에게 장욱진 내외가 찾아왔다. 윤광조는 1977년 장욱진을 처음 만났다. 현대화랑 신춘기획전 때 자신이 출품한 작은 연적(이번 회고전에 출품됐다)을 장욱진이 애장품으로 사준 것이 계기였다. 어떤 가식도 없이 유유자적 무위의 삶을 좇으며 그림만 그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이차를 넘어선 예인의 동질감을 느꼈다. 이듬해 봄 박명자 현대화랑 사장의 주선으로 두 사람의 합작 전시회까지 열리게 된다. 자신이 빚은 분청사기에 장욱진이 질박한 선으로 사람·산·강 등을 그려넣은 합작 도예품들은 개막하자마자 30분만에 출품한 40점이 매진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작업장 마무리 공사를 하던 중 방문한다는 장욱진의 전갈을 받고 반색한 윤 작가는 붕어, 메기가 들어간 민물고기 매운탕과 막걸리를 시켜서 준비해놓고 부부 내외를 맞았다. 둘 사이에 막걸리가 한순배 돌고 정담이 오갔다. 묵묵히 잔을 기울이던 장욱진이 옆에 있던 갱지를 만지작거렸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전시실에 나온 장욱진 작가의 ‘무제’와 당시 작업 광경을 찍은 사진을 관객이 감상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윤광조는 남편의 기색을 살피던 부인 이순경이 자신에게 귀띔을 했다고 떠올렸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시는 것 같다는 거예요. 붓이나 종이가 있냐고 그러더군요. 제가 작업 구상이 떠오를 때 메모하려고 놓아둔 갱지 묶음이 옆에 있었어요. 그건 됐는데 붓이 없는 거예요. 퍼뜩 성냥개비를 쓰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대 다니던 시절 성냥개비를 입으로 짓이겨 낙서처럼 스케치하고 장난 친 기억이 있었거든. 그래서 성냥개비 하나를 들고 와서 제 입으로 질겅질겅 씹어서 이겨놓고 손으로 비비고 훑어서 한쪽 끝을 여러 올의 붓털처럼 만들었어요. 그걸 드렸더니 웃으면서 받아 갱지 위에 휘휘 그리시더니 조금 뒤 완성해 건네주시는거예요. 저와 선생의 식사 광경과 먹은 매운탕 속의 붕어와 메기, 이런 것들이 작업실 산과 강에 어우러진 풍경이었지요. ”

그날 이후 윤광조는 제목없는 이 그림에 액자틀을 끼워 안방 벽에 내걸었고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날마다 그림을 보고 지낸다. 산과 강, 새와 집, 사람 등은 장욱진의 50여년 그림 여정에서 단골처럼 나타나는 도상들이다. 성냥개비 붓질로 휘저어 그린 무제의 풍경은 까끌까끌한 갱지의 재질 위에 소탈하고 깔끔하게 이런 도상들을 회화적으로 약간씩 변모시키면서 풀어놓았다. 부드럽게 굴곡진 선으로 흘러가는 산야와 그 위에 툭 점으로 찍은 해와 달, 두 개의 선으로 휙 그어 묘사한 강, 산 기슭과 강에 있는 제비, 물고기들, 그리고 강가 아래서 매운탕 먹는 두 작가와 작업장…단순한 선과 점으로 경물의 특징을 단박에 포착하는 작가의 감각적 붓질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비친다. 특히 붕어와 함께 묘사한 메기의 모양새가 압권이다. 세 개의 짧고 긴 획만으로 지느러미와 몸체의 특징을 떠내듯 묘사해 놀라움을 안겨준다.

더욱이 이 그림은 걸맞는 짝까지 딸렸다. ‘무제’를 그리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당시 장욱진 내외를 차에 태우고 광주 작업장에 함께 갔던 지인인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82·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이 곁에서 바로 촬영한 것이어서 그림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김 교수는 그 전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평소 관심있던 문화판을 기웃기웃하며 예인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1979년 여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장욱진에게 윤광조 작업장이 다 지어졌으니 한번 가보자고 재촉해 자신의 차로 동행하게 됐다는 회고다. 그는 외출 때마다 갖고 다녔던 휴대용 독일제 콘탁스 카메라로 고인이 런닝셔츠 바람에 쭈그린 채 앉아 성냥개비 붓으로 잉크병에서 안료를 적셔서 휘휘 그리는 화흥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오랫동안 윤 작가에게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고인이 타계하고 10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 안강 작업실을 찾아온 김 교수가 사진을 건네주었고, 그림 ‘무제’와 한 갖춤을 이루어 윤 작가의 ‘가보’로 남게 되었다. 작가는 “볼 때마다 선생과 같이 지냈던 시간들을 생각한다. 저를 정말 아껴주셨다는 생각이 들어 기쁘고 행복해진다”고 털어놓았다.

장욱진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유족에게 성냥개비붓 그림과 사진의 일화를 전해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배원정 연구사도 윤 작가와 김 교수의 작업실을 찾았다. ‘무제’ 그림과 사진을 전시하고 싶다고 대여를 요청했다. 두 사람은 흔쾌히 승낙했고, ‘무제’와 김 교수의 사진은 관객 앞에 처음 실물을 선보이게 되었다. 전시는 이달초 끝났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막힘 없이 발산했던 장욱진의 예술혼과 주위 예인들의 열린 마음, 그리고 이들이 엮어나간 풍류의 인연은 두 작품에 깃들어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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