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울린다, 이 코미디…'바튼 아카데미'

손정빈 기자 2024. 2. 19.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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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시종일관 우스꽝스럽고 유머러스하다고 영화 '바튼 아카데미'(원제:The Holdovers)(2월21일 공개)를 얕게 봐선 곤란하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새 영화는 내내 웃음기를 머금고 있으나 이 작품에 담긴 인간과 삶에 관한 통찰은 워낙 예리해서 닿기만해도 베일 듯하다. '바튼 아카데미'는 말하자면 인생 에세이다. 가족이란 무엇인지, 상실이란 무엇인지, 외로움이란 무엇인지, 나란 존재란 무엇인지, 위로란 무엇인지, 관계란 무엇인지, 꿈이란 무엇인지, 어른이란 무엇인지, 열등감이란 무엇인지, 공감이란 무엇인지 등 살면서 맞닥뜨리고 고민하는 것들에 관해 얘기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주인공 폴 허넘(폴 지어마티)의 이런 일갈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닭장 속 횃대 같은 것이야. 더럽고, 옹색한 법이지."


허넘은 사립 학교 바튼 아카데미에서 고대 문명사를 가르치는 교사. 꼬장꼬장한 성격 탓에 학생은 물론이고 동료 교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는 그는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숙직을 하며 집에 가지 못하는 학생을 관리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남은 학생은 5명. 각자 사정으로 학교에 남겨진 이들은 허넘에게 붙잡힌 꼴이 되지만 극적으로 이 중 한 명의 집에 함께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앵거스 털리(도미닉 세사)는 가지 못한다. 부모와 통화가 되지 않아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바튼 아카데미엔 허넘과 털리 그리고 이 학교 주방장인 매리 램(데이바인 조이 랜돌프) 세 사람이 남아 2주 간 함께 지내야 한다. 악연이 있는 허넘과 털리 그리고 뜬금 없이 두 사람과 함께하게 된 램은 잘 지낼 수 있을까.


'바튼 아카데미'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걸 한다. 이 작품이 짚고 넘어가는 인생에 관한 온갖 주제는 책 한 권에 담기도 부족할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이지만, 페인 감독은 이걸 영화만의 방식으로 13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품어낸다. 단순해 보이지만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플롯,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보여주는 내러티브, 죽비를 내려칠 때와 한 가득 감싸 안을 때를 구분하는 아포리즘 대사, 수백 마디 말로도 부족할 감정을 찰나에 담는 연기, 화려하지는 않아도 보여줘야 할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촬영 등 좋은 영화의 미덕을 고루 갖춰가며 장면 장면마다 관객 마음을 흔든다. 허넘은 자신에게 성경·코란과 같은 책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마치 <명상록>의 영화 버전이 되려는 것만 같다.


스스로 낙오를 택해 자신을 유폐한 듯한 중년, 가족에게 버림 받아 외톨이가 된 듯한 소년, 아들을 떠나 보내고 삶의 이유를 잃은 듯한 여성을 통해 '바튼 아카데미'가 보여주려는 인간은 각자 우울 속에서 허덕이는 존재이고, 삶은 그럼에도 견뎌내야 하는 비루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무의미하고 삶은 무상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법은 없다. 이 영화는 인생이란 필연적으로 외로운 것이지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허넘과 털리와 램이 각자 속내를 꺼내 보일 때 시릴 것만 같았던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자꾸만 온도가 올라간다. 털리가 우울증 약을 먹는다는 걸 알게 된 허넘은 자신의 우울증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슬픈 미소를 짓는다. 나만 불행하다는 교만이 아니라 누구나 나만큼 슬프다는 겸손, 그게 이 영화의 태도다.


'바튼 아카데미'는 위로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격려의 영화다. 물과 기름 같은 교사와 학생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대개 다음 세대인 학생이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 주인공은 삶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게 남아 있어 일분 일초가 더 아까울지 모르는 기성 세대인 교사다. 허넘이 털리에게 건네는 조언이나 충고는 사실 그렇게 살지 못한 자신을 향한 질책이나 다름 없다. 허넘에게 <명상록>을 선물 받았던 램은 보답으로 빈 노트를 건넨다. 다른 이들이 쓴 책을 읽는 삶에서 그만 빠져 나와 자기만의 책을 완성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이 고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바튼 아카데미'는 잠시 막혀버린 인생을 다시 흐르게 할 힘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바튼 아카데미를 떠나는 사람은 털리도 램도 아닌 허넘이며, 그는 낙오된 게 아니라 유임(hold over)됐을 뿐이다.


허넘을 맡은 폴 지어마티는 필모그래피 최고 연기로 '바튼 아카데미'를 완성한다. 지어마티는 인생의 고독과 너절함을 대사 하나 없이 얼굴에 담는다. 허넘은 그렇게 단순하게 괴팍하기만한 캐릭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위엄 있는 인간이 돼 관개 곁에 선다. 지어마티는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3월에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다. 아카데미에선 '오펜하이머'의 킬리언 머피의 수상이 유력하나 만에 하나 지어마티가 받게 된다고 해도 전혀 이변이 아닐 것이다. 그 역시 오스카를 들어올릴 자격이 있다. 도미닉 세사는 역할에 어울리는 연기를 하고, 데이바인 조이 랜돌프는 이번 아카데미의 가장 강력한 여우조연상 후보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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