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죽음 꼬리 문 의혹…혹한의 감방·독극물 중독·의문의 주사까지

홍석재 기자 2024. 2. 18. 15: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7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에펠탑 인근에 알렉세이 나발니 러시아 야당 지도자를 추모하며 \'사랑은 두려움보다 강하다\'라고 적힌 종이가 바닥에 놓여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불과 나흘 전 (면회로) 만났을 때만 해도 건강하게 살아있었고, 행복해 보였는데….”

‘푸틴의 유일한 정치적 대항마’로 불리던 러시아의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47)의 갑작스런 죽음에 그의 어머니 류드밀라는 그저 허망해했다. 40대의 젊은 정치인이 러시아 대선을 불과 한달 앞둔 16일(현지시각)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의 하르프 정착촌에 있는 제3교도소(IK-3)로 이감된 지 두달 만에 돌연 숨지자 이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나발니가 숨지던 상황에 대해 “형무소에서 산책을 하던 도중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한 뒤, 의식을 잃고 쓰러져 회복하지 못한 채 숨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쓰러지고 2분 뒤 교도소 의료진이 도착했고, 다시 4분 뒤 구급차가 도착했지만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의료진들이 나발니를 살리기 위해 30분 가까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전했다. 결국 이날 오후 2시17분 숨지고 말았다.

서구 언론들은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다양한 추정을 쏟아내고 있다. 2021년 2월 러시아 당국에 의해 체포돼 수감된 뒤 3년 동안 무려 300일간 독방에 갇혀 지냈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 정부가 이번 죽음을 의도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나발니가 “수감기간 중 4분의 1 이상을 ‘냉동 처벌 감방’에서 보냈다”며 “한번은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던 일도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말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교도소의 하나로 ‘북극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제3교도소로 이감된 게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이 교도소는 겨울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고 수감자에 대한 형벌 가운데 한겨울에 외투 없이 밖에 서있거나 찬물을 뒤집어 씌우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5월에야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는데, 여름에는 밤이 없는 긴 낮이 이어지는 등 날씨도 수감자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발니는 2021년 체포되기 4개월 전, 옛 소련 시절 사용되던 신경작용 독극물 ‘노비촉’ 테러로 3주간 사경을 헤메다 살아난 바 있다. 교정 당국은 나발니에게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서 있기 힘들 정도의 심각한 허리 질환으로 다리 한쪽이 마비되고, 디스크 탈출증을 의심할 만한 정황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루 전인 15일 법정에 출석한 영상에선 맑은 정신과 건강 상태를 보인 바 있다. 갇혀 있던 지난 3년 동안에도 ‘푸틴 없는 러시아'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해 반푸틴 운동을 벌이고, 3월 대선에서도 유권자 1인이 다른 10명을 설득해 반대표를 던지도록 독려하는 등 푸틴 대통령에게 ‘눈에 가시같은’ 구실을 해왔다. 비비시는 “나발니가 법정에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초췌해졌다”고 묘사했다. 독극물 중독 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혈관 속 핏덩어리(혈전)가 뭉쳐져 사망에 이르게 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도 18일 “러시아 수사 당국이 나발니의 사인을 조사 중이지만, 혹독한 환경에서 장기간 수감 생활을 한 데서 비롯된 (사실상의) ‘타살’이라는 견해도 있다”며 “3월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앞둔 푸틴 정권이 나발니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의혹도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발니의 죽음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한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나발니 사망 소식이 알려진 직후 “나발니의 죽음이 푸틴과 그의 깡패들이 한 어떤 행동에 따른 결과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이 죽음에 대한 러시아의 책임을 묻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교장관 역시 서방 주요 7개국(G7)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대응 조처를 검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푸틴은 야권 지도자든 자신에게 표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든 원하면 누구나 죽인다”고 비난했다.

세계 여론도 악화하고 있다. 비비시는 17일 “나발니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통치에 도전하다 사망한 러시아 저명인사 중 가장 최근 사례가 됐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는 “푸틴 반대 세력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해외로 도피했지만 새 순교자(나발니)의 등장은 푸틴에 대한 의문과 비난에 힘을 실어줄 것이며, ‘푸틴 신화’를 유지하기 훨씬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의도적 타살’로 푸틴 대통령이 얻을 게 뭐가 있냐는 반론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러시아 엘리트층 사이에서는 나발니가 ‘순교자’로 여겨질 가능성과 이를 통해 서방이 푸틴 정권에 대한 결의를 강화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늘릴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전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