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외된 한국인, 200년 전 고독한 철학자를 소환하다 [이슈 속으로]
“삶은 어떻게든 끝내야하는 힘든 과제”
고통과 고난을 통찰한 ‘염세주의’ 철학
세기말 정치·종교 혼란 겪은 시민 매료
‘군중 속 고독’ 韓 독자에도 큰 울림 줘
‘마흔에 읽는…’ 등 관련 서적들 인기 ↑
“한국 경제성장 속 상대적 박탈감 커져
고독·관계 고민하는 독자들 반응한 듯”
“젊은이, 플라톤과 칸트를 깊이 연구해보게.” 어느 날, 청년은 슐체 교수로부터 고전 철학을 공부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1810년 스물두 살 청년의 철학적 여로가 시작되었다.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원점이었다. 젊은 시절 ‘근대의 3대 철학자’로 ‘데·칸·쇼(데카르트·칸트·쇼펜하우어)’라고 외웠던 바로 그다. 그는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로 생각하고 이듬해 가을 베를린 홈볼트대로 전학했다.
쇼펜하우어는 어릴 때부터 사업가 출신 아버지에 의해 사업가 교육을 받아왔다. 1788년 폴란드의 항구도시 단치히에서 사업가이자 은행가였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사업가 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12년부터 플라톤과 칸트를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베이컨과 로크, 흄 등 영국 사상가의 철학도 탐구했다. 고전 철학과 고전문학을 집중해 읽었다. 이탈리아 작가 단테와 마키아벨리, 페트라르카를 좋아했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스페인 원어로 읽었다.
“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1818년 서른 살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저이자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는 세계를 ‘표상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로 나누고 인식론으로 파악한 표상의 세계는 왜곡된 가상에 불과한 반면, 의지의 세계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의지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 규칙 등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베를린대 강사직에 지원한 쇼펜하우어는 1820년 시범 강의에서 통과해 강사가 됐다. 하지만 그의 강의는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 만에 끝났다. 더구나 강의 도중 헤겔과 논쟁을 한 뒤 헤겔과 틀어졌다. 헤겔은 당시 철학계를 주름잡고 있었기에 그는 한동안 독일 철학계에서 무시됐다. 반대로 그 역시 헤겔을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고 비판하는 등 강단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교수들의 파벌을 증오한 그는 이후 아무런 소속이나 단체에 얽매이지 않고 대학 밖에서 단독자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저술과 번역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1831년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
삶은 고독했지만, 그는 자신에 충실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고,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일정한 시간에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했다. 개에 목줄을 채우는 것마저 동물 학대라고 말할 정도로 동물 애호가였다.
비록 앞머리가 빠져서 보기 흉해졌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헤겔이 죽은 뒤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었고 1850년대부터 여러 대학에서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했다. 그의 책 몇 권은 영국과 프랑스에도 번역 출간됐다.
폐렴 증세가 있던 그는 평소처럼 일찍 기상해 쾌활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가정부는 집안을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고 집 밖으로 나갔다. 주치의가 거실에 들어왔을 때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1860년 9월21일 아침, 쇼펜하우어가 72세의 나이로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우선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니체는 그의 영향과 자신의 신비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유럽 사상의 종말을 선언했다. 철학은 물론 과학, 음악가 바그너를 비롯해 예술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장 크게 미친 것은 문학이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프랑스의 모파상, 프루스트, 독일의 토마스 만, 헤세, 체코의 카프카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 바람이 최근 국내 출판가에서 거세게 불고 있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는 지금까지 수십만 부가 팔리면서 지난해 11월 셋째 주부터 올해 1월 셋째 주까지 10주 연속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지켰고, 이번 주에도 2위에 올라 있다. 그의 책 ‘소품과 부록’을 편역한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페이지2)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포레스트북스) 등도 역시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왜 갑자기 이 시기 한국 사회에서 쇼펜하우어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까. 우선, 한국인들이 지금 ‘풍요 속의 빈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깜짝 놀랄 만한 경제성장 속에서도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고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고독과 소외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 연구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직장, 가정, 학교뿐 아니라 나이 들어 홀로 살아가며 관계와 고독에 대해 고민한 독자가 반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뿐은 아닐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곱씹어야 할 주장이나 지혜, 그의 인상적인 삶 등 다양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강 연구원은 책에서 “그의 철학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신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준다. 아울러 행복을 자기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는 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단순한 열풍의 배경을 아는 것을 넘어서 쇼펜하우어의 삶과 철학, 사유의 여정 속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이유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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