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외된 한국인, 200년 전 고독한 철학자를 소환하다 [이슈 속으로]

김용출 2024. 2. 1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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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판가 쇼펜하우어 열풍
“삶은 어떻게든 끝내야하는 힘든 과제”
고통과 고난을 통찰한 ‘염세주의’ 철학
세기말 정치·종교 혼란 겪은 시민 매료
‘군중 속 고독’ 韓 독자에도 큰 울림 줘
‘마흔에 읽는…’ 등 관련 서적들 인기 ↑
“한국 경제성장 속 상대적 박탈감 커져
고독·관계 고민하는 독자들 반응한 듯”
곱슬머리에 눈이 쑥 들어간 한 청년이 독일 중부 니더작센주 괴팅겐에 위치한 괴팅겐대 한 교실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수업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며 적지 않은 저술을 펴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 교수였다. 한 해 전 괴팅겐대 의학부에 입학한 청년은 의학은 물론 물리학, 수학, 역사, 법학 등 다양한 교양 강좌를 들어왔다. 그런데 전공인 의학보다 오히려 철학에 더 흥미를 느꼈고, 집에 돌아와선 철학적 사색을 이어갔다. 특히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철학적 사색을 발전시키는 것이 흥미로웠던 그였다.

“젊은이, 플라톤과 칸트를 깊이 연구해보게.” 어느 날, 청년은 슐체 교수로부터 고전 철학을 공부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1810년 스물두 살 청년의 철학적 여로가 시작되었다.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원점이었다. 젊은 시절 ‘근대의 3대 철학자’로 ‘데·칸·쇼(데카르트·칸트·쇼펜하우어)’라고 외웠던 바로 그다. 그는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로 생각하고 이듬해 가을 베를린 홈볼트대로 전학했다.

쇼펜하우어는 어릴 때부터 사업가 출신 아버지에 의해 사업가 교육을 받아왔다. 1788년 폴란드의 항구도시 단치히에서 사업가이자 은행가였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사업가 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12년부터 플라톤과 칸트를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베이컨과 로크, 흄 등 영국 사상가의 철학도 탐구했다. 고전 철학과 고전문학을 집중해 읽었다. 이탈리아 작가 단테와 마키아벨리, 페트라르카를 좋아했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스페인 원어로 읽었다.

그는 1813년 논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논문에선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따라야 하는 법칙으로 생성과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가지 ‘충족이유율’을 주장했다. 튀링겐 주립대에 논문을 제출해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3년 뒤 단행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를 출간했다.
◆“표상의 세계는 가상, 의지가 본질”

“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1818년 서른 살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저이자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는 세계를 ‘표상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로 나누고 인식론으로 파악한 표상의 세계는 왜곡된 가상에 불과한 반면, 의지의 세계야말로 세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의지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 규칙 등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지는 나누어지지 않고 우주 전체가 하나의 의지가 된다고 생각했다. 무생물의 에너지조차 일종의 의지라고 바라봤다. 문제는 각 개인이 본질적 의지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표상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면서 어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끊임없이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는 개별적인 삶 자체가 표상이라는 가상이 만들어낸 고통이기 때문에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즉 직관적으로 의지의 이념을 포착하고 통찰해서 하나의 우주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와 너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기에 서로 싸울 필요가 없고, 서로를 구분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도 사라질 것이며, 온전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 “의지의 자유로운 부정이나 포기와 함께 이 모든 현상도 이제 없어진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쇼펜하우어의 이 같은 생각은 우주 만유가 부처 하나뿐이고, 이것을 깨치면 모두 부처가 된다는 불교 사상과 맥이 닿아 있다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책은 1년 동안 겨우 100권밖에 팔리지 않았다. 그는 책의 내용과 가치를 몰라보고 무시하는 듯한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이후 ‘논쟁적 토론술’(1831),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1840), ‘윤리의 두 가지 근본 문제’(1841), ‘소품과 부록’(1851) 등을 저술했다.
쇼펜하우어. 위키피디아
◆결혼도 않고, 평생을 고독하게

베를린대 강사직에 지원한 쇼펜하우어는 1820년 시범 강의에서 통과해 강사가 됐다. 하지만 그의 강의는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 만에 끝났다. 더구나 강의 도중 헤겔과 논쟁을 한 뒤 헤겔과 틀어졌다. 헤겔은 당시 철학계를 주름잡고 있었기에 그는 한동안 독일 철학계에서 무시됐다. 반대로 그 역시 헤겔을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고 비판하는 등 강단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교수들의 파벌을 증오한 그는 이후 아무런 소속이나 단체에 얽매이지 않고 대학 밖에서 단독자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저술과 번역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1831년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

삶은 고독했지만, 그는 자신에 충실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고,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일정한 시간에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했다. 개에 목줄을 채우는 것마저 동물 학대라고 말할 정도로 동물 애호가였다.

과민하고 괴팍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밤에 잠자다 미미한 잡음만 들려도 벌떡 일어서서 권총을 집어 들었고, 자신의 수염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외식할 때 다른 사람이 사용한 잔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잔을 미리 준비하기도 했다.
◆니체, 바그너에 영향… ‘염세주의’로 호명

비록 앞머리가 빠져서 보기 흉해졌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헤겔이 죽은 뒤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었고 1850년대부터 여러 대학에서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했다. 그의 책 몇 권은 영국과 프랑스에도 번역 출간됐다.

폐렴 증세가 있던 그는 평소처럼 일찍 기상해 쾌활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가정부는 집안을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고 집 밖으로 나갔다. 주치의가 거실에 들어왔을 때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1860년 9월21일 아침, 쇼펜하우어가 72세의 나이로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인생이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힘든 과제와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인생을 견뎌냈다’라는 말은 멋진 표현이다.”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쇼펜하우어 흉상.
그의 철학은 ‘염세주의’로 분류돼 왔다. 헤겔적 합리주의에 반대해 비합리적인 행동이자 에너지인 의지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고, 생의 고통에서 결정적으로 해방되기 위해선 의지를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일본 철학자 누기 시게토는 책 ‘철학’에서 그의 철학을 염세주의라고 규정하고 “정치와 역사, 종교에 의지할 수 없게 된 세기말의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니체와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우선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니체는 그의 영향과 자신의 신비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유럽 사상의 종말을 선언했다. 철학은 물론 과학, 음악가 바그너를 비롯해 예술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장 크게 미친 것은 문학이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프랑스의 모파상, 프루스트, 독일의 토마스 만, 헤세, 체코의 카프카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쇼펜하우어는 이례적으로 국가주의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평했다. 칼 융은 자서전에서 헤겔에 대해선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고 비판했지만, 쇼펜하우에 대해선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고 상찬했다.
◆국내 출판가 바람 “군중 속의 고독 영향”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 바람이 최근 국내 출판가에서 거세게 불고 있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는 지금까지 수십만 부가 팔리면서 지난해 11월 셋째 주부터 올해 1월 셋째 주까지 10주 연속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지켰고, 이번 주에도 2위에 올라 있다. 그의 책 ‘소품과 부록’을 편역한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페이지2)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포레스트북스) 등도 역시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왜 갑자기 이 시기 한국 사회에서 쇼펜하우어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까. 우선, 한국인들이 지금 ‘풍요 속의 빈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깜짝 놀랄 만한 경제성장 속에서도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고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고독과 소외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 연구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직장, 가정, 학교뿐 아니라 나이 들어 홀로 살아가며 관계와 고독에 대해 고민한 독자가 반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뿐은 아닐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곱씹어야 할 주장이나 지혜, 그의 인상적인 삶 등 다양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강 연구원은 책에서 “그의 철학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신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준다. 아울러 행복을 자기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는 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단순한 열풍의 배경을 아는 것을 넘어서 쇼펜하우어의 삶과 철학, 사유의 여정 속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이유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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