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서울 지하철’ 노선을 설계했다고?…최초의 모습 어땠길래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4. 2.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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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철도 건설사를 따라 걷다 (1)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내빈들이 지난 1월 25일 경기도 의정부시 다목적체육관에서 열린 수도권 공역급행철도(GTX)-C노선 착공 기념식에서 기념 세러머니를 하고 있다. [매경DB]
지난 1월 정부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A, B, C노선의 연장과 D, E, F 노선의 신설을 골자로 하는 광역교통망 구축안을 발표하며 수도권서 서울도심까지 ‘출퇴근 30분’의 청사진을 내놓았습니다. 역이 어디 들어서냐에 따라 해당지역은 물론 인접지역까지 들썩일 정도로 철도교통은 도시의 발전과 시민들의 생활편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흔히 철도라 하면 도시와 도시 간 장거리를 연결하는 기차와 도시 내에서 주요지역을 잇는 도시철도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오늘부터 사-연에서 다룰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서울도시철도’에 한정해 보겠습니다. 서울 곳곳에 촘촘하게 배치된 서울지하철은 어떤 계기와 방식으로 계획되었을까요.
정부가 ‘교통 분야 3대 혁신 전략’을 공개한 지난 1월 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인근 GTX-A 노선 공사장 내부 터널에서 국토교통부가 현장 설명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최초의 도시철도, 전차
흥인지문 홍예를 지나는 전차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성벽이 헐린 것과 전차 선로의 모습을 보아 1911년 이전에 촬영된 사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철도사업은 크게 ‘철도’와 ‘궤도’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철도는 말 그대로 기차(고속열차)가 달리는 전용의 선로이고, 궤도는 도로교통의 일부로서 기본적으로 노면을 달리는 철도를 말합니다. 그 점에서 대한민국에 가장 먼저 생긴 도시철도는 궤도 전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는 1899년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 청량리를 잇는 약 8km의 전차노선을 개통합니다. 최초의 노선이 이렇게 설계된 이유는 고종황제가 명성황후의 묘소가 있는 홍릉까지 전차를 이용해 행차할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회사 설립 및 전차 운영권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66년 동대문 전차 사업소에 정차되어 있는 전차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전차 도입 첫 해 교통사고로 어린이가 사망하고 일본인 운전수가 도주하자 격분한 대중들이 전차와 변전소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전차 승차 습관이 정착되지 않은 초창기에는 과도기적인 불상사도 없지 않았지만, 이내 전차는 한성부민들의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근현대시기 서울도시축의 발달은 곧 전차교통의 연장이었습니다. 본선과 을지로선, 서대문·마포선, 효자동선, 왕십리선 등 십여 개의 노선이 한성 주요 지점을 오고가며 승객들을 수송했습니다.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에 의해 전면 폐지되기까지 전차는 약 70년간 서울 시내교통의 중심적 존재였습니다.
1969년 서울 광화문우체국(왼쪽), 갈월동(오른쪽)을 비롯한 도심 곳곳에서 전차 궤도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일본 교통조사단이 제안한 지하철 5개 호선
1914년 촬영된 조선총독부 철도국 청사의 전경. 용산역 앞에 자리해 있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최초의 지하철 계획이 수면 위로 오른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였습니다. 산업화가 진전하며 경성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어섰고, 전차와 버스만으로는 여객 수송에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이 때, 지하철 계획을 세운 것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아니라 민영철도회사였습니다. 경북선과 황해선, 함북선 등 국철 철도노선을 보유한 ‘조선철도 주식회사’와 도쿄의 자본가들이 세운 ‘경성철도 주식회사’, 이 두 곳은 서울역과 청량리역을 잇는 노선을 제시하며 조선총독부에 부설권을 요구합니다. 조선총독부는 도쿄지하철 사업에도 참여를 하고 있는 조선철도 주식회사에 부설권을 부여했지만, 이것이 착공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도쿄지하철 건설도 자금난에 허덕이며 공사의 진전을 보이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인 1961년 철도청은 서울역과 청량리역, 이 두 거점을 최단거리로 잇는 동시에 도심 중심부를 지나는 도시철도 노선을 계획합니다. 9.8km의 노선 공사비는 75.4억 원으로 예상되었는데, 대부분은 외자로 충족시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재정형편상 사장되고 말았습니다.

1960년대 서울시내 도로교통상황. 버스와 자동차가 뒤엉켜 정체를 빚고 있는 모습이다. [서울메트로]
1960년대 서울 도심의 극심한 교통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김현옥 서울시장이 내놓은 해결책은 고가차도의 건설이었다. 1968년 최초의 입체교차로인 ‘삼각지고가도로’가 세워졌고(왼쪽), 이듬해 최초의 고가차도인 ‘아현고가도로’ 개통을 시작으로 해마다 고가차도가 건설되었다(오른쪽). [서울기록원]
한편 1960년대 들어서 서울의 인구증가와 함께 교통문제는 악화일로였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65년 서울시는 ‘시정 10개년 계획안’을 작성하며 자체적으로 지하철 상세 계획에 착수합니다. 계획에는 서울의 교통 혼잡을 완화하고 부도심 개발을 위해 도로망과 함께 4개의 지하철 노선을 구축하며, 이 중 2개 노선 15km을 10년 내에 건설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때 제시한 노선도가 흥미롭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1961년 철도청 계획과 같았고, 2호선은 서소문과 을지로, 성동을 연결했습니다. 3호선은 은평에서 시작해 중앙청, 퇴계로, 뚝섬과 천호동을 이었고, 우이동에서 시작한 4호선은 미아리, 장충단, 제3한강교를 지나 영동부도심과 양재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거창한 발표와 달리 이 계획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시의 부도심계획 자체가 뚜렷하게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지하철 건설재원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하철 3·4호선의 재원의 경우 ‘1·2호선의 수익금으로 충당한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두루뭉술했습니다. 게다가 김현옥 서울시장은 지하철 건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의도 윤중제와 청계천 고가 등 서울시 곳곳에 벌여 놓은 사업만으로 이미 총력을 쏟아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함께 김현옥 시장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양택식 시장이 부임합니다. 당시 서울 인구는 500만 명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서울 외곽지역과 연결되는 반경 45km의 광역 수도권 인구는 1,3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서울의 교통수단 이용률은 버스 및 택시가 95%를 점했지만, 그중 75%는 시내 도심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양택식 시장은 전임 철도청장 출신답게 취임 직후부터 서울 교통난의 해결책으로 지하철 건설 카드를 꺼냅니다. 취임 직후 그는 서울시 도시계획본부 산하로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를 설치합니다. 건설본부는 점차 몸집을 키워 가며 서울지하철 구상의 대들보 역할을 합니다. 양택식 시장 재임 중 서울지하철 관련 장족의 발전이 있어 양 시장은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 7월 서울에서 제4차 한일정기각료회의가 열리고 있다. 회담 이후 양국은 한국의 경제개발 제3차 5개년계획을 적극 지원한다는 28개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KTV]
그해 7월, 한일정기 각료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회의의 마지막 안건은 교통수송문제와 관련된 내용이었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서울지하철 건설에 일본이 재정·기술적으로 협력해줄 것을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안에 일본 측은 대체로 찬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지하철 건설안이 번번이 무산되었던 이유인 ‘자금 조달’이 회의를 통해 어느 정도 물꼬가 트인 것입니다. 회의가 폐막하며 발표된 공동성명에는 일본 측이 서울지하철 건설과 국철 전철화를 위한 종합조사에 일본인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한다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이후는 서울지하철 착공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8월에는 서울시장과 교통부장관이 일본 도쿄를 방문해 지하철을 시찰하였고, 9월에는 철도산업 관계자와 도시계획, 전기, 설비 전문가로 구성된 10명의 일본 교통조사단이 서울로 파견되었습니다. 교통조사단은 서울시의 도시계획과 교통수요 분석을 통해 10년 후인 1981년 시점의 서울에서 가장 적절한 지하철 노선계획을 내놓았습니다. 구상의 핵심 토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 교외에서 직선으로 CBD에 이르러 (중심업무지구/서울의 경우 사대문 안) 다시 교외로 뻗어 나가는 선형의 지하철 - 인구밀집지역을 통과하되 고속을 유지하기 위해 심한 노선굴곡은 없어야 함 - 1호선은 가장 긴요한 구간을 통과해야 함 - 1회 환승으로 각 방면에 닿을 수 있어야 함 - 도시계획 및 도로, 철도와의 연계성을 고려해야 함

교통조사단은 서울 교외지역 열 곳을 둘씩 연결하는 다섯 개의 호선을 기획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미아동, 청량리, 천호동, 경마장(뚝섬), 보광동, 용산, 서울역, 마포, 신촌, 냉천(독립문)이었습니다. 모든 호선은 서울 도심부를 지나며 뻗어나가는 방사형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4대문 안에서 각각의 노선이 얽히며 오밀조밀한 노선망을 형성했습니다.

1970년 10월 정부가 발표한 ‘1호선 건설계획 및 수도권전철계획’이 반영된 노선도. [서울교통공사]
다만 일본조사단이 노선을 기획하며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울의 사대문 안이 후에도 유일한 업무지구로 기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노선을 편성한 것입니다. 영등포는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부도심으로 설정했고, 당시 논밭이었던 영동의 경우 애초에 지하철이 닿는 지역도 아니었습니다. 서울이 팽창하고 단핵도시에서 다핵도시로 거듭나며 지하철 2호선이 순환선으로 변경되었고, 위 구상의 일부 수정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 내용은 다음 화에서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970년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 관계자들이 서울역~동대문~청량리역 구간 측량을 하고 있다. [KTV]
지하철 1호선 서울역~청량리역 구간 노선도. [KTV]
일본조사단이 떠난 10월 정부는 1호선의 건설계획과 수도권 전철계획을 발표합니다. 1971년 착공해 2년 후인 1973년 완공, 1974년부터 운행에 돌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도시철도, 즉 지하철의 신설구간은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였고, 나머지는 경인선·경부선·경원선으로 운행되던 국철 구간을 고속전철화하고 역을 추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산만 내자 230억 원, 외자 5000만 달러에 달하는 대공사의 시작이었습니다.
1972년 4월 작성된〈서울시지하철및수도권전철화사업을위한차관계약〉, 《차관협정관계철》. [서울시]
<참고자료>

ㅇ「서울지하철건설삼십년사」, 서울시

ㅇ 최항길,「서울 도시철도 120년」, 메이트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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