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나의 갓생’, 꾹꾹 눌러 예쁘게 간직하고파 [ESC]

한겨레 2024. 2. 1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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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다꾸’의 세계
다이어리에 감정·일정 담고 명언·스티커 등으로 장식하는 ‘다꾸’
“개인 생활 중시, 자기 물건 꾸미는 행위로 연결…일정 관리 재밌게”
‘디지털 다꾸’ 있지만 아날로그 대세…“손으로 써야 기억에 더 남아”
지난 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이수민씨가 2024년 다이어리에 스티커 사진을 붙인 뒤 일기를 쓰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가을에 언니와 길을 걷다 주운 은행잎, 외국에서 가져온 영수증, 친구와 찍은 사진, 코로나 음성확인서, 재즈 페스티벌 티켓, 편지, 명함…. 보면서 그 당시를 떠올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이어리에 붙여 스크랩해요. 바쁘게 살다가도 다이어리를 쓰고 꾸미면 내 삶으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죠.”

항공사 디지털영업팀에서 일하는 이수민(27)씨는 2019년부터 6년째 자신의 감정과 일상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일상의 흔적들을 추려 붙이는 ‘스크랩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시작한 건 2022년부터다. 다이어리에 일상의 기록을 예쁘게 꾸며 담아내는 걸 ‘다꾸’라고 한다.

마테·젤펜·떡메·색연필 등 ‘필수템’

“처음엔 물건을 다이어리 안에 끼워뒀는데, 자꾸 사라지더라고요. 마음에 드는 무늬의 ‘마테’(마스킹테이프의 줄임말)로 고정하면서 자연스럽게 꾸미기 시작했어요.” 얇은 종이로 만들어진 ‘마스킹테이프’는 접착 기능에 스티커와 같은 장식 효과를 겸비해 ‘다꾸러’(다이어리를 꾸미는 사람)들에겐 필수템 중 하나다. 이씨가 애용하는 마테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나락도 락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씨는 “락(록) 음악을 좋아해서 골랐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내가 쓴 글이나 스크랩한 내용보다 더 튀지 않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이날 이씨는 친구와 찍은 사진을 마테로 붙이고, 그 옆에는 회사에 지각할 뻔한 일을 적었다.

숱한 스크랩으로 가운데가 볼록 솟은 이씨의 연간 다이어리 표지에는 또 다른 다꾸 필수템인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었다. 이씨는 “그해 내가 어딜 갔고 뭘 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내 취향을 외부에 드러내는 쉬운 방법”이라고 했다. 이날 이씨는 “멋있게 사는 게 멋있게 사는 거지”라는 문구가 적힌 푸른색 스티커를 2024년도 다이어리 표지에 붙였다.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엠제트(MZ) 세대와 연결하는 온라인몰 ‘신이어마켙’의 스티커를 애용해요. ‘미루다 보면 첩첩산중이다’ ‘자유는 마음에 있다’등 할머니들이 쓰신 문구들을 보면 마음가짐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다꾸에 쓰이는 스티커 종류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다양한 모양으로 바로 떼어 쓸 수 있게 제작된 ‘돔송’(도무송 스티커, 영국 인쇄기 ‘톰슨 프레스’의 톰슨의 일본어식 발음에서 유래)과 직접 오려 써야 하는 ‘인스’(인쇄소 스티커)다. 편리한 건 돔송이나, 손맛을 중시하는 다꾸러들은 인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이수민씨가 2024년 다이어리 표지에 “멋있게 사는 게 멋있게 사는 거지”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다꾸는 기본이 되는 스티커와 마테부터 스티커 전용 핀셋, 테이프 커터기, 젤펜, 색연필, 스탬프, 북 클립, ‘떡메’(떡제본된 메모지, 포스트잇과 달리 접착 기능이 없는 메모 뭉치) 등 각종 도구를 쓴다. 다이어리 종류로는 접착제로 속지를 고정한 양장과 속지에 구멍을 뚫어 고리에 끼우는 6공이 대표적이다. 속지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무지·줄·모눈과 연간·월간·일간으로 나뉜다. 다이어리를 예쁘게 꾸미되 글은 쓰지 않는 이미지 중심의 스타일부터 꾸미기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글 기록에 무게를 두는 스타일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다꾸’ 열풍은 현재진행형이다. 온라인 쇼핑몰 에이블리가 지난해 10월20일부터 한달간 집계한 ‘스티커·다꾸’ 카테고리의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50% 증가했다. 교보문고 핫트랙스, 텐바이텐 등 문구용품 판매 업체들은 각종 스티커를 판매하는 전용 코너를 운영하며, 다이소 일부 매장에는 다꾸 용품만 모아둔 전용 매대가 갖춰졌다. 인스타그램의 ‘다꾸’ 관련 해시태그는 700만개를 웃돈다.

엠제트 세대가 다꾸에 빠진 이유에 대해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개인 생활 중시와 자기 계발을 주요 동기로 설명했다. “개인 생활을 중시하는 태도가 자기 물건을 정성스럽게 꾸미는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또 요즘 엠제트의 트렌드인 ‘갓생’(God+生, 모범적이고 부지런하게 잘 사는 삶)을 살려면 목표를 세우고 일정을 꼼꼼히 관리해야 하는데요. 다꾸는 이 쉽지 않은 일을 재밌게 하기 위한 방편이자, 실체 없는 개념인 갓생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이어리 쌓이면 중요한 부분은 ‘스캔’

요즘 ‘다꾸계’에서는 아련한 감성의 ‘빈티지’, 세기말 느낌의 ‘와이투케이’(Y2K) 등 다양한 스타일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영화나 게임 등을 모티브로 한 ‘콘셉트 다꾸’와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미니 다꾸’도 인기다. 울산에 사는 유튜버 이즈노(35)는 1990년대생들이 초등생 시절 문구점에서 구매했을 법한 ‘고전 문구’ 스타일의 스크랩 다꾸 콘텐츠로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다꾸’ 유튜버 이즈노가 ‘고전 문구’ 스타일 스티커로 다이어리를 꾸미고 있다. 유튜브 ‘이즈노 마이 플랜 이즈 노 플랜(My plan is no plan)’ 갈무리

10살 때부터 다꾸를 시작한 실력자 이즈노에게 ‘다꾸 꿀팁’을 묻자 의외로 “속지가 핵심”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눈에 띄는 건 화려한 장식이지만, 다꾸를 오래 하려면 속지가 중요해요. 라인인지 모눈인지부터 종이 두께와 질감까지 자기와 맞는 걸 찾아야죠. 다음으로 완벽주의를 버리고 일단 한권만 채우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해야 즐겁고 빠르게 자기 스타일을 찾을 수 있어요.” 초보 단계에서는 무작정 스티커나 마테 등을 사기 전에 전단지·영수증 등에서 글자를 오려내 콜라주 방식으로 자유롭게 디자인하는 것도 연습이 된다고.

다꾸를 할수록 쌓이는 다이어리는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 그는 “현실적으로 다이어리를 다 갖고 있기 어려워 일부는 정리할 생각”이라며 “마음에 드는 부분은 스캔해서 디지털화하면 된다”고 귀띔했다. 다이어리를 버릴 때 개인 정보 유출이 우려된다면 가정용 문서 파쇄기를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수민씨는 “손때가 타고 약간 망가지는 게 다이어리의 매력이다. 정말 지키고 싶은 부분에만 투명 테이프를 붙인다”고 했다.

구정윤(가명)씨가 핼러윈 느낌으로 기록한 ‘디지털 다꾸’. 구정윤 제공

태블릿 피시(PC) 등 전자기기를 활용한 기록 문화가 퍼지면서 ‘디지털 다꾸러’들도 늘고 있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구정윤(가명·27)씨는 2018년 처음 아날로그 다이어리를 쓰다가 제로 웨이스트에 대한 관심으로 ‘디지털 다꾸’로 전환했다. 2021년부터 삼성 갤럭시탭에서 필기앱 ‘삼성노트’를 활용해 디지털 다꾸를 해온 구씨는 여행, 공연, 기념일, 주간·월간 일정 등을 기록한다. 기본 제공되는 속지·표지 서식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무료 공유·판매되는 스티커·마테·메모지 등의 이미지 파일을 내려받아 썼다. “태블릿과 펜만 있으면 되니 간편해요. 수정이 자유롭고 한번 산 스티커를 계속 쓰고, 펜 색깔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 좋죠.”

디지털 다꾸를 얘기할 때 ‘굿노트’를 빼놓을 수 없다. 삼성노트와 기본 기능은 유사하나, 안정적인 필기감과 지우개를 쓴 뒤 원래 사용 중이던 필기구로 돌아가는 기능 등 사용자 친화성 면에서 장점이 있다. 오랜 기간 애플 기기 전용 앱이었는데 2023년부터 안드로이드용으로도 출시됐다. 굿노트로 2021년부터 디지털 다꾸를 시작한 일러스트레이터 겸 그래픽 디자이너 정땅콩(활동명·34) 작가는 원하는 서식을 직접 만들어 쓰다가 판매까지 하게 됐다. 굿노트를 처음 사용할 때 마음에 드는 서식을 찾기 어려웠던 정 작가는 직접 디자인 툴을 활용해 피디에프(pdf), 제이피지(jpg), 피엔지(png) 등 이미지 파일로 서식을 만들어 사용했고, 이 서식을 자신이 운영하는 온라인숍(피넛인더포) 등에서 판매했다. 이 서식은 굿노트뿐 아니라 삼성노트와 ‘노타빌리티’ 등 다른 노트 앱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 앱들은 앱 외부의 서식을 넣어 쓰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수많은 무료·유료 서식 중 ‘내 것’을 찾는 팁은 뭘까. 정 작가는 “월간·주간·일간·무지 등 각자 필요한 속지가 제각각이지 않나. 평소 쓰는 다이어리와 어느 정도 구성이 일치하면,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권했다. 내지 수를 늘리거나 순서를 바꾸는 조정이 자유로운 디지털 다이어리지만 디자인은 한번 고르면 전문가 수준이 아닌 이상 이걸 수정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곧장 원하는 페이지를 찾아 이동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 기능을 가진 서식도 추천된다.

정땅콩 작가가 1월 첫주 일정을 기록한 ‘디지털 다꾸’ 모습. 정땅콩 제공

‘디지털 다꾸를 잘하는 팁이 뭐냐’는 질문에 정 작가는 자유로운 사진 첨부 기능을 꼽았다. “언제든 사진을 찍고 바로 가져와 쓸 수 있는 게 디지털 환경이잖아요. 그 위에 그림이나 글을 살짝씩 더하면 그 페이지는 더욱 만족스러워요.” 디지털 다이어리에서는 링크 걸기, 메모 연동 기능으로 연결성을 넓힐 수도 있다. 거북목 방지를 위해서는 태블릿 거치대가 필수다. 마음에 드는 서체를 찾아 키보드로 타이핑을 하면 손글씨 쓰는 수고를 덜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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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선택 ‘아날로그의 기쁨’

디지털의 여러 장점에도 ‘다꾸계’에선 아날로그가 아직 더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틱톡·블로그 등에서 ‘다꾸’를 검색해보면 상위에 노출되는 것이 대체로 아날로그 다꾸이고, 검색 결과도 아날로그 다꾸가 디지털 다꾸에 견줘 훨씬 많다. 아날로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뭘까. 이수민씨는 “공부할 때도 타자로 치기보다 직접 손으로 써야 기억에 더 잘 남지 않나. 다이어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물성도 또 하나의 강점이다. 이즈노는 “디지털 다꾸는 재료가 만져지지 않아 내 것 같은 느낌이 적다. 실제 스티커들을 가지고 디자인할 때 진짜 내 것이 탄생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배터리 떨어질 걱정 없고 언제든 직접 열어서 확인할 수 있는 아날로그 특유의 몽글몽글한 감성이 좋다. 시간 대비 효율성은 떨어지지만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전했다.

이수민씨가 다이어리에 일기를 쓴 뒤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제한된 선택에서 비롯된 역설적 기쁨도 있다. “재료 선택 등이 자유로운 디지털에 비해 아날로그는 선택지가 좁기에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막막함이 생기는데 그걸 즐기는 거죠!” 이즈노가 말했다.

오프라인 가게 중 ‘다꾸 성지’로 불리는 곳들이 있다. 각종 문구류가 구비된 교보문고 광화문점(서울 종로구)과 강남점(서울 서초구)의 ‘문보장’ 코너, 층마다 테마가 다른 ‘포인트오브뷰’(서울 성동구), 디아이와이(DIY) 다이어리가 주력 상품인 ‘머쉬룸페이퍼팜’(서울 마포구), 마스킹테이프 전문 편집숍 ‘롤드페인트’(서울 마포구), 여러 브랜드와 작가가 입점한 스티커 전문숍 ‘말랑상점’(서울 마포구) 등. 아날로그 다꾸에 대한 정보는 2004년 개설된 네이버 카페 ‘다이어리 꾸미기’를 비롯해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각종 온라인 플랫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굿노트와 삼성노트 외에 디지털 다꾸 앱으로는 귀여운 캐릭터 테마가 특징인 ‘자꾸다꾸’와 ‘다욜’, 그림을 그린 뒤에도 펜선 편집이 가능한 노타빌리티 등이 있으며 구글 캘린더와 연동되는 ‘구글 노션’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유해강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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