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없이 사진 4585장 붙였다, 15분 간 ‘상상하는 영화’

서정민 2024. 2. 17.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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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무비 도전한 김용호 사진가
(왼쪽부터) 사진가 김용호,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정가 가수 정마리, 해금 연주자 강은일, 작곡가 최우정. 김상선 기자
상업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김용호 사진가가 새 도전을 시작했다. 15분짜리 단편영화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 연출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우리나라에서 개발 중인 AI 편집기술을 이용한 영화 4편을 지원하면서 프랑스 작가 스테판 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옴니버스 영화 ‘서울도시전설’ 4편이 제작됐고, 그 중 한 편이 김용호가 각색·연출을 맡은 ‘데 베르미스 서울리스’다.

원작소설과 동명인 제목은 라틴어 조어로 ‘서울 벌레에 대하여’라는 의미. 붕괴한 아파트의 가루를 먹고 사는 벌레 이야기인데, 김용호는 원작의 은유적인 스토리를 자기만의 해석으로 새롭게 각색했다.

AI 시대, 100년 전 활동사진으로 불안 표현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을 오마주한 영화 첫 장면. [영화 스틸 김용호]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4585장의 사진을 편집한 ‘스틸 무비’라는 점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영화도 원리상으로는 정지된 사진을 빨리 돌려서 동영상으로 만든 거죠. 우리 삶은 AI 등 하이테크 기술의 진보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만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죠. 희망보다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백 년 전 활동사진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었어요. 장면과 장면 사이 간극에서 또 다른 시공간을 상상해보라는 거죠.”

지난해 여름 김용호의 카메라는 서울의 ‘산동네’들을 훑었다. 고도성장한 서울은 안을 들여다보면 아파트를 비롯해 고층빌딩으로 뒤덮인 도심과 그 안에서 밀려난 이들의 공간인 산동네로 갈린다. 영화 속에서도 부산엑스포 유치 광고판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배우 이정재의 모습과 산동네의 좁고 낡은 골목 풍경은 슬픈 대조를 이룬다. “거대한 도시로 몸집을 키운 서울과 그 이면의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야기예요.”

영화 속 주인공은 ‘호랑이’와 ‘토끼’다. 김용호는 2022년부터 ‘십이지신’ 중 그 해의 동물을 골라 모델에 탈을 씌우고 여러 상황을 연출하는 ‘메이킹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다. 새해에는 경복궁에서 산책을 하고, 을지로 재개발로 철거되기 직전의 을지면옥을 찾아가 냉면을 먹고. ‘다큐멘터리를 메이킹한다’처럼 모순된 표현은 김용호의 사진에서 중요한 주제다.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현실과 비현실, 거짓과 진실을 경계 없이 오가는 순환구조를 좋아해요. 처음과 끝을 단정짓지 말라는 거죠.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으니까.” 탈을 쓴 인물 역시 김용호라는 실존인물일 수도, 보통의 한국 남녀라는 가상 인물일 수도 있다. 다만, 김용호는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소비문화와 미학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호랑이와 토끼는 보통의 누군가다.

이 영화가 새로운 도전인 또 다른 이유는 탐미주의 사진가인 김용호의 내공이 발휘됐다는 점에서다.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콘텐트 ‘오징어 게임’ 등으로 주목받은 K무비는 글로벌에서 K컬처의 저력을 보여줬지만, 후속 콘텐트들이 대부분 ‘폭력’이라는 편향된 주제만 다루면서 주제의 빈곤이라는 위기에 봉착했다. 김용호는 K무비의 새로운 지향점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평소 음악·미술·무용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오랜 지인인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좀 더 세련되게 한국의 모던과 전통을 조합시켜 유미주의, 심미주의를 극대화해보자는 계획이다.

배우 김범진, 무용수 정현숙의 출연 장면. [영화 스틸 김용호]
우선 연극배우 김범진과 국립무용단 정현숙 무용수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영화에서 ‘무당’과 ‘키 작은 남자’ 역할을 맡아 굿판을 연상시키는 춤으로 호랑이와 토끼의 혼란, 전통과 모던의 혼재를 보여준다. 무당의 화려한 무복은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의 작품이다. 김 디자이너는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도 무당의 옷만큼은 요즘 젊은 세대의 유행처럼 남녀의 것이 따로 없이 자유로웠다”며 “과거와 현대를 잇는 의상으로 가장 맞춤하다”고 했다. 4585장의 사진이 모두 흑백이지만, 그중 무당이 등장하는 장면만큼은 컬러인 이유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다.

서울의 텅 빈 허상을 상징하는 콘크리트 공간에는 현대미술가 빠키(Vakki)의 기하학적인 설치작품들을 배치했다. 이 장면 역시 컬러 사진인데 서울의 우울하면서도 역설적인 화려함을 상징하는 소품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대사가 없다. 소설 속 문장들이 자막으로 몇 번 등장할 뿐, 주인공들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는 철저히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대신 김용호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을 이용해 이야기의 정서를 전달한다.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를 구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게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1880)이었어요. 그리고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가 떠올랐죠.”

“비현실적인 것들은 현실에 존재” 메시지

보통 남녀를 상징하는 영화 속 주인공 ‘호랑이’와 ‘토끼’. [영화 스틸 김용호]
주인공 호랑이와 토끼는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찾아 배를 타고 산동네를 떠나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들이 떠난 출발점이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에 등장하는 물에 잠긴 낡은 아파트의 모습은 뵈클린의 ‘죽음의 섬’에 대한 오마주다. 김용호는 이 무거운 절망과 혼란 위에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를 펼쳐놓는다. “단, 이것은 서울, 우리의 이야기니까 한국적인 색채를 입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작곡가 최우정씨에게 음악 편집을 부탁했죠.”

영화음악을 새로 작곡하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는 그것도 너무나 유명한 곡에 한국적인 색채까지 얹어서 영상에 맞게 편집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최 작곡가는 “사진들을 편집한 장면이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 기존 영화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리드미컬한 매력으로 다가와 선뜻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최 작곡가가 20여 분이 넘는 라흐마니노프 원곡을 15분으로 편집하고 그 위에 해금, 정가, 타악기 소리를 얹은 덕분에 영화는 대사 한 마디 없이도 힘 있고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게 됐다.

해금 연주는 강은일씨가 맡았다. 김용호의 사진 시리즈 ‘피안’에 감동해 동명의 공연을 한 적도 있는 강 연주자는 영상을 보면서 장면에 어울리는 음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사진과 사진이 이어지는 사이를 소음처럼 또는 효과음처럼 채운 해금 소리는 우리 소리인 듯 아닌 듯 새로운 색깔로 다가온다. 강 연주자는 “1983년도에 처음 해금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해금은 국악계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던 악기였다”며 “연못 위에서만 바라보던 연꽃을 처음으로 연못 바닥에서 올려다본 ‘피안’ 시리즈는 관점을 달리하면서 존재의 이유를 새롭게 만들어온 해금과 나의 이야기를 닮았다”고 했다.

이미지와 음악만 가득한 이 불친절한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목소리’를 보탠 사람은 정가 가수 정마리씨다. 정가는 사대부들이 시조에 가락을 붙여 불렀던 전통 성악으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노래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버들은’이라는 세 음절을 버드으ㅇㅇㅇㅇㅇㅇ을으으으으은으로 부른다. 영화에서도 ‘사랑 거짓말’ 다섯 음절을 호흡의 끊김 없이 1분 넘게 노래하는데 해체된 음절들이 격조 높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정씨는 “서울의 과거·현재·미래를 고민하는 영화처럼 수백 년 이어져온 정가도 미래의 모습을 숙제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작업은 의미 있었다”고 했다. 15분짜리 단편영화에서 K무비의 새로운 미학과 국제영화제 출품을 기대하는 이유도 이처럼 역량 있는 스타 아티스트들이 퍼즐조각처럼 빈틈없이 포진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비현실적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들은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김용호의 말을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에 진실이 있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시대 서울의 진실은 뭘까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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