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력사…북 표기법 만든 언어 천재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푸른역사
로동-노동, 력사-역사, 녀자-여자, 론리-논리…. 앞은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은 북한식, 뒤는 남한식 표기법이다. 두음 표기 방식은 현재 남북 간 정서법의 대표적 차이로 종종 거론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음법칙을 폐기하는 등 여러 가지로 남한과 달라진 북한의 표기법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립됐는지 궁금해진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 무렵까지 북한 언어학의 모든 분야를 주도한 언어학자이자 언어정책의 설계자인 김수경(金壽卿·1918~2000)을 빼놓고는 설명이 어렵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남북한의 정서법에 차이가 생기게 된 연유에 대해 면밀하게 추적한 결과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평전의 지은이는 일본인이다. 저자 이타가키 류타(51) 일본 도시샤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을 ‘비판적 코리아 연구자’로 칭한다. 이 책의 일본어판은 2021년 발간됐다.
1947년 6월 ‘로동신문’에 두음법칙을 폐지하는 것이 훨씬 더 언어생활에 유익하다는 내용의 글이 나흘에 걸쳐 게재됐다. 이 글은 북한 조선어문연구회를 대표해 김수경이 집필한 것으로 이타가키는 추정한다. 이 글에는 만약 한자가 완전히 철폐돼 한자를 한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등장했을 때, ‘같은 어원, 같은 의미의 음은 언제나 같은 문자로써 표시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는 논리가 펼쳐졌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책정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에 규정된 외래어 표기의 모순도 지적했다. ‘Roma’의 경우 두음법칙을 적용하면 ‘노마’가 돼야 하는데 통일안은 ‘로마’로 적게 했다. 두음 ㄴ과 ㄹ의 발음문제에 대해서도 “그 음들은 실지로 발음할 수 있으며, 발음하고 있으며 또한 발음시켜야 한다”고 일축했다.
김두봉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 영향력이 줄어들고 1958년 실각하면서 김수경도 비판의 격랑에 휩싸였다. 1968년 김수경은 중앙도서관(1981년부터는 인민대학습당) 사서로 사실상 좌천됐다. 이후 20년간 공개된 연구업적이 전무하며 학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8년에 와서야 공적인 학술 활동의 장에 재등장했으며 복권됐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김수경이 2000년 타계하기까지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중 가족의 이산과 재상봉이라는 현대 한국사의 격동을 몸소 겪었다.
남한에서는 해방 후 오랫동안 북한의 학문사를 터부시해 왔다. 1980년대 이후에서야 북한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이 책이 김수경과 북한의 언어생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남북한의 맞춤법 차이 등을 해소하는 노력을 재개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경환 자유기고가 khhan888@gmail.com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