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

2024. 2. 16.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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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한 淸 보고 북학사상 수용
인조와 갈등으로 의문의 죽음

1637년(인조 15) 2월 5일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는 청나라의 수도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의 굴욕의 조건으로,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인조실록’은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니, 신하들이 길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하였는데, 혹 재갈을 잡고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가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에 정명수(鄭命壽)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하였으므로 이를 보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여 당시의 참담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1637년 4월 10일 소현세자 일행은 심양에 도착하였다. 처음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客館)인 동관에 머무르다가, 5월 7일 황제가 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거처인 심양관으로 옮겼고 세자는 이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인조와 함께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경험했던 세자는 처음에는 반청(反淸) 감정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심양 생활을 통하여 청나라의 놀라운 발전을 직접 목격하면서 생각이 바뀌어 갔다. 명나라를 압박하며, 거침없이 뻗어가던 군사 강국의 면모와 함께 문화 대국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었다. 아담샬과 같은 독일인 선교사를 통하여 천주교뿐 아니라 화포, 망원경과 같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있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소현세자는 북경의 남천주당에서 아담샬과 만나면서 서양 문명과 천주교를 접하는 기회를 가졌고, 조선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나갔다.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화포와 천리경 등을 가져온 것도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는 명나라와 조선의 연결 고리가 없어졌음을 판단하고 세자의 귀국을 허락했다. 1645년 2월 8년 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세자의 귀국을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와 인조의 갈등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야사의 기록에 ‘소현세자가 청나라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부자의 갈등은 컸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은 인조에게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인조는 청나라에서 자신을 물러가게 하고 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특히 경계하였다. 고려후기 몽골 간섭 시기에 고려 왕을 마음대로 교체한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면 숭명반청(崇明反淸)과 북벌(北伐)의 이념이 퇴색될 것을 우려했다. 귀국 후 이어진 정치적, 이념적 갈등은 세자의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2022년 11월에 개봉된 영화 ‘올빼미’는 소현세자의 독살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인조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1645년 4월 26일 소현세자가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조실록’ 기록에는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붉은 피가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하여, 세자의 독살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마친 후, 세자에게 석철(10세), 석린(6세), 석견(3세)의 세 아들이 있었지만, 세손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물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조는 자신의 후계자로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을 지목하였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도 왕위는 세자의 아들이자 손자인 정조에게 물려준 사례를 보아도 분명 파격적인 후계자 승계였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 인질 생활을 한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北學) 사상을 조선에 수용하여 변화와 개혁을 할 것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현재의 왕’ 인조와 정면으로 충돌하였고, ‘독살’이라는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효종 즉위 후 북벌이 국가 정책이 되면서, 북학이 다시 자리를 잡기까지는 100여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지금도 많은 아쉬움을 주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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