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현신’들이 들려주는...같지만 다른 슈만 협주곡

2024. 2. 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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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콩쿠르 선후배 블레하츠·조성진
3개월새 슈만 협주곡 1번 각각 연주
블레하츠는 템포 밀당·조성진 구조감
지나침 없는 정교한 세련미는 공통점
조성진(가운데)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Konrad Stohr 제공]
라파우 블레하츠(가운데)와 바르샤바 필하모닉 [부천아트센터 제공]

쇼팽이 걸어나왔다. 메마른 겨울 나무의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롭게 보이다가 그 위로 날아든 작은 새처럼 발랄이 비집고 나온다. ‘쇼팽의 나라’에서 태어나, 쇼팽을 가장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가르는 콩쿠르에서 역사적 기록을 세운 주인공. 라파우 블레하츠(39)는 피아노 앞에 앉은 내내 쇼팽의 현신이었다.

라파우 블레하츠가 한국을 찾았다. 123년 역사를 가진 모국의 악단인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다. 바르샤바필은 1901년 창단 직후 유럽의 주요 악단 중 하나로 도약했지만,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은 후, 1950년 부활해 폴란드의 음악적 뿌리를 잇고 있는 오케스트라다.

바르샤바필과 라파우 블레하츠는 13일 경기도 부천아트센터에서 한국 관객과 만나 슈만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려줬다. 이 곡은 지난해 11월 안드리스 넬손스가 이끄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조성진이 함께 한 연주이기도 하다. 블레하츠와 조성진은 10년의 시간 차를 둔 쇼팽 콩쿠르 선후배다.

블레하츠와 조성진은 ‘우승 자체가 역사’가 되는 최고 권위의 경연인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전례없는 기록을 세운 연주자들이다.

블레하츠는 200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은 물론 마주르카 최고연주상, 폴로네이즈 최고연주상, 피아노협주곡 최고연주상, 소나타 최고연주상 등 전 부문(4개) 특별상을 싹쓸이, 대회 역사상 최초로 5관왕에 올랐다. 그는 ‘완벽주의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이후 30년 만에 등장한 쇼팽 콩쿠르의 자국 우승자였다.

블레하츠가 일찌감치 한국에서도 ‘유명인사’가 된 것은 그가 우승하던 해 임동민, 임동혁 형제가 2위 없는 3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쇼팽 콩쿠르 결선에 오른 것은 ‘동동 브라더스’가 처음이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피아니스트 피오트르 팔레치니는 “블레하츠는 다른 파이널리스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다르게 뛰어났기에, 그 누구에게도 2위를 수여할 수 없었다”는 평을 남겼다.

10년 뒤 등장한 조성진은 한국인 ‘최초’의 쇼팽 콩쿠르 우승자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폴로네이즈 최고 연주상도 가져가며 2관왕에 올랐다. 이후 조성진은 한국의 ‘클래식 스타’로 떠올랐다. 방탄소년단 (BTS) 뷔가 즐겨듣는 피아니스트이며,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2018)의 주인공이 조성진의 열혈팬으로 나올 만큼 누구나 이름을 아는 음악가가 됐다.

3개월의 시간 차를 두고 연주한 두 사람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완전히 다른 음악이었다. 곡의 해석과 흐름, 오케스트라와의 호흡 등 많은 면에서 각각 그들만의 특성을 드러냈다.

수줍게 걸어나와 피아노 앞에 앉은 블레하츠는 ‘템포의 마법사’였다. 1악장부터 빠르게 몰아치면서도 군데군데 서정과 낭만을 잊지 않았다. 블레하츠의 템포 밀당(밀고 당기기)에 오케스트라는 탁월한 순발력으로 손을 맞췄다.

때때로 마음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1, 3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는 속도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것만 같았다.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는 난데없이 속도를 늦춰 잡아끌었고, 블레하츠는 그것을 자기 페이스로 돌려 달려 나갔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광경이었으나 1악장 중반 이후로 넘어서며 서로가 서로를 잘 맞춰줬다. 그 과정에서 피아노는 목관 악기처럼 온화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그러다 3악장에 접어들면 휘몰아치는 악단의 소리에 블레하츠가 성실히 손을 맞췄다.

이런 장면들은 지난해 조성진과 넬손스의 만남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이들은 이미 수차례 맞춘 호흡이 빛을 발하듯 서로를 향한 끈끈한 신뢰가 이어져 무대로 증명됐다. 조성진은 이 곡을 연주하며 탁월한 리듬감과 음폭의 변화로 감정 변화를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그가 구상한 음악이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며 탄탄하게 구조가 잡혔고, 그래서 기승전결이 분명해졌다.

블레하츠의 개성이 살아난 건 독주와 2악장에서였다. 건반 위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은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손을 대면 연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힘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만드는 음악이면서도 아름다운 낭만을 잃지 않았다.

반면 조성진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첫 소설부터 몸이 붕 뜰만큼 강력한 타건을 보여줬고, 앞으로의 전개 방향에 대한 힌트를 줬다. 그러다가도 목가적인 서정이 가득한 2악장을 들려주더니, 응축한 감정을 폭발하는 3악장까지 단 하나의 음표에서도 실수 없이 연주를 끌고 갔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세련미였다. 블레하츠는 지나친 법이 없어 촌스럽지 않았고, 조성진은 정교하게 구축된 음악 안에서 자유의지로 세련된 음악을 만들어갔다. 블레하츠의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앙코르였다. 이날의 앙코르는 쇼팽 왈츠와 프렐류드였다. 두 곡의 짧은 앙코르는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상당수 관객이 이 곡을 듣고 다가올 그의 리사이틀(2월 27일, 예술의전당)의 티켓팅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역시나 쇼팽의 재림이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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