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락된 보고서’에 결재하지 않았나요?
[편집자주] 많은 리더가 말하기도 어렵지만, 글쓰기는 더 어렵다고 호소한다. 고난도 소통 수단인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리더가 글을 통해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노하우를 구체적인 지침과 적절한 사례로 공유한다.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와 <일하는 문장들> 등 글쓰기 책을 쓴 백우진 글쟁이주식회사 대표가 연재한다. <편집자주>
차관보가 전화해 나를 불렀다.
나는 7년 일간지 기자 경력을 접고, 재정경제부 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때였고, 내가 근무한 부서는 경제홍보기획단이었다. 일반인 대상 경제정책 홍보를 수행하는 부서였다. 주요 현안을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때로는 오해를 해소하는 단행본, 브로슈어, 광고, 기고문 등을 작성하는 업무를 했다. 국장급이 단장이었고, 3개 과가 있었다.
과 업무 이외에 다른 부서에서 별도의 작업을 때때로 내게 요청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 일손을 보태 기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차관보실에 갔더니, 장관 연설문 수정 건을 도와달라는 건이었다. 장관이 주요 도시에서 동일 주제로 강연을 하는데, 연설문 원고가 여러 차례 퇴짜를 맞았다고 했다. 장관 연설문은 해당 부서의 사무관이 초안을 작성하면 과장이 고치고 국장이 손질한다. 이 과정을 거쳐서 작성된 연설문 원고를 몇 번 고쳐서 올렸는데 장관이 오케이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고쳐야 할 연설문 원고가 책상에 두 부 놓여 있었다. 차관보는 원고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수정하면 좋을지 말했다. 나는 그 지시를 받아 적었다. 다음 날 출근 전에 수정본을 보고할 수 있도록 작업해달라고 했다.
자리에 돌아오니 퇴근 무렵이었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하고 야근을 시작했다. 조직이 개편되고 명칭이 기획재정부로 바뀐 재정경제부는 과천정부종합청사에 있었다. 일간지 기사 마감에 비해 느긋한 작업이었다. 차관보 지시에 따라 수정본 작성을 마치니 열한 시 가까이 됐다.
‘추가로 내 버전 연설문 원고를 준비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수정본을 쓰면서 든 어렴풋한 느낌이 작업을 마치자 구체화된 것이었다.
‘오케이!’
자문자답한 뒤 집에 전화했다.
“오늘 야근하고 있는데, 밤샘 작업을 해야겠어.”
마음은 더 여유로워졌다. 아침까지 넉넉한 시간 속에서 장관 연설문에 내 ‘식견’(?)을 담아 내보인다는 점이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연설문 추가 원고를 작성해 두 벌을 출력한 뒤 책상 앞에서 눈을 붙였다. 청사 앞 목욕탕에서 간단히 샤워하고 왔다.
차관보에게 보고할 때 요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차관보의 지시를 야근하면서 충실히 이행하는 행동은 기본이다. 그러나 시키지 않은 일을 추가로 한 행위는 의도와 달리 ‘주제 넘은’ 나아가 ‘건방진’ 짓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 내용이 좋아도 그것을 재가받으려면 결재권자의 마음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조언이 있다. 나는 추가본이 차관보의 검토를 받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설명했다.
“말씀하신 대로 고쳐서 수정본을 작성했습니다. 작업을 마친 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플랜B로 추가본도 만들어봤습니다.”
수정본과 추가본의 표지 왼쪽 상단에는 각각 ‘A案’과 ‘B案’이라고 적어 표시했다.
다행히 내 요령이 통했다.
차관보는 수고했다며 뜻밖의 추가 지시를 했다. 장관실에 보고가 잡혀 있는데,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기꺼이 따라갔다. 계약직 공무원 ‘나’급으로서는 장관 보고에 배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긴 테이블의 장관 맞은편에 차관보가 앉았고, 나는 그 옆에 자리 잡았다. 장관은 차관보가 함께 제출한 수정본과 추가본을 한 장씩 넘겼다. 불과 몇 페이지 넘긴 뒤 장관이 B안으로 가자고 말했다.
‘문장력’보다는 ‘누락 채워서’ 통과
업무 체증이 한 번에 뚫린 셈이었다. 차관보가 나를 칭찬했다. 소식은 금세 퍼졌다. 그날 오후 복도를 지나는데, 국장 한 명이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백 형이 글을 매끄럽게 고쳐준 덕분에 연설문이 통과됐네요. 고마워요.”
나는 국장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초점이 벗어난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내 추가본이 채택된 것은 단어 선택과 표현, 서술의 매끄러움 덕분이 아니었다. 장관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추가본이 낙점받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추가본에는 수정본에 누락된 주요 사항이 채워져 있었다. 추가본을 작업하기로 결심한 것도 수정본의 그 누락이 보여서였다.
이번 원고의 주제를 ‘누락 없이’로 잡은 날, 귀가해 책장의 문서 더미를 뒤졌다. 다행히 당시 작성한 연설문 원고 두 벌이 있었다. 수정본은 “우리 경제에 있어 구조조정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면서 구조조정은 시작 단계이고 그 효과가 국민경제에 실질적으로 파급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측면의 내실화와 함께 시장참여자들의 의식과 관행에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고 서술했다. 말하자면 1단계 구조조정에 이어 올해부터는 2단계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추가본은 왜 2단계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지, 그 논리를 앞세웠다. 당시 각계에서 ‘구조조정 그만큼 했으면 되지 않았나’ ‘이제 완화적인 정책을 펴 경제에 숨통을 틔워주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강조하려면 설득의 논리를 제시해야 했다.
추가본의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은 추가본 연설문으로 주요 도시를 돌면서 강연했다. 내가 보관한 연설문 자료는 대구·경북지역 경제설명회에서 활용됐다. 제목은 ‘현 경제상황과 과제’, 연설 날짜는 1999년 2월 4일이었다. 나는 32세였다.
리더라면 보고서에 누락 없는지 챙겨야
리더는 이 장관처럼 자신에게 올라온 자료에 주요 사항이 누락됐는지 점검해야 한다. 업무용 자료라면 더욱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챙겨서 읽어봐야 한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가상의 예화를 공유한다.
녹색시의 신그린 시장은 기후변화에 대응한 녹색행정을 시정 기조 중 하나로 내걸고 시 공무원에게 그런 행정을 마련해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가운데 시 청사의 옥상이 누수가 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해당 부서는 옥상 방수공사를 하는 김에 쿨루프 공사를 병행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쿨루프는 특수 도료를 칠해 태양광을 상당히 차단함으로써 여름철 냉방 효율을 높인 지붕을 가리킨다. 신 시장의 시정 기조에 부합하는 계획이었다.
해당 부서는 공사의 두 계기(방수와 쿨루프), 전체 공사비, 공사비의 면적당 평균 단가, 예산 조달 방법 등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결재를 올렸다. 시장은 흔쾌히 사인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계획 중 쿨루프 공사는 시공되지 않았다. 주요 사항이 누락된 탓이 컸다. 보고서는 전체 공사비가 어떻게 나뉘는지, 즉 쿨루프로 비용이 얼마나 추가되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특히 쿨루프 공사를 하면 냉방 효율이 얼마나 향상되는지를 적지 않았다. 예상 효과는 관련 업체의 견적이나 시공된 기존 사례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효율 향상의 결과 연간 시 청사의 냉방 전기요금이 얼마나 절감되며, 따라서 쿨루프 공사비는 몇 년 후면 다 회수할 수 있다는 효과를 보고서 작성자는 조사하지도, 넣지도 않았다.
시장이 오케이한 쿨루프는 시 의회에서 잘렸다. 시 의원은 “방수에 쿨루프까지 하면 예산이 많이 드는데, 쿨루프를 추가로 하면 사무실 온도가 얼마나 낮아지나요”라고 물었다.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부서의 책임자는 답변하지 못했다. 알아보지 않았고 보고서에 쓰지 않았으니 대답할 지식이 없었다.
직장인의 글쓰기, 공무원의 글쓰기를 강의하면서 현장에서 작성되고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결재를 받은 보고서를 자주 접한다. 보고서에는 간혹 누락된 사항이 보인다. 누락의 영향은 보고서의 완성도 저하에 그치지 않는다. 누락으로 인해 일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수 있다. 아예 잘리기도 한다. 보고서는 일과 직결된다. 리더라면 올라온 보고서에 누락 사항이 없는지 뜯어봐야 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백우진 글쟁이(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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