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행사·제사때 ‘축문’ 책임… 잘못 쓰면 벌 받아 꺼리던 업무[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4. 2. 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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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5) 책 인쇄·도장 글자 담당 교서관
왕이 틀린 글자 발견하기도
세종땐 축문 담당 고정직책
전서 능통한 인물 특채까지
한때는 승려가 책 인쇄 맡아
공물대납 문제로 문종때 폐지
성균관·예문관과 함께 ‘삼관’
왕이 내린 술로 3년마다 연회
실록에선 ‘사치의 일종’ 묘사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교서관의 임무와 역할

교서관(校書館)은 책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일, 제사에 쓸 향을 관리하고 축문을 작성하는 일, 인장에 새기는 글자에 관한 업무를 보는 곳이다. 교서관의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 구성되며 대개는 겸직이다. 제조는 2명이고, 판교 1명, 교리 1명, 별좌와 별제는 모두 4명이다. 이들 별좌와 별제는 정6품과 종6품이며, 정7품 박사 2명 이하로는 저작 2명, 정자 2명, 부정자 2명이 있다.

교서관은 교서감이라고도 불렸으며, 세조 때는 전교서로 개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종 때 다시 교서관으로 환원됐다. 정조 때에는 규장각에 편입됐는데, 규장각을 내각이라고 하고, 교서관은 외각이라고 했다.

교서관에서는 도장에 글씨를 새기는 일 때문에 전서에 능통한 인력을 3명 이상 반드시 배치했다. 조선 시대의 도장은 대개 전서(篆書)로 새겼기 때문이다. 전서라는 것은 한나라 이전에 사용하던 글씨체를 말한다.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한자는 한나라 때 전서를 간단하게 만든 글자이고, 그 때문에 한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 이전에 쓰던 글자체를 전서라고 하는 것이다.

대개 전서는 진(秦)의 통일 이전의 사전인 대전과 통일 이후의 사전인 소전의 글씨체인 대전체와 소전체를 일컫는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갑골문자를 포함한 상고시대의 글자를 통칭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고택에 가면 전서로 쓴 글씨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갑골문자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흡사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교서관 관원은 전서를 잘 쓰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때로는 다른 관청의 관원 중에서 전서를 잘 쓰는 사람을 교서관에 특별 채용하기도 했다.

교서관의 임무 중에는 축문을 쓰는 것도 매우 중요했는데, 때로는 축문을 엉터리로 써서 중벌을 받는 관원도 있었다. 왕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왕은 친압(親押)을 행하는데, 친압 과정에서 축문의 잘못이 발견되곤 했다. 친압이란 왕이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실에 거둥해 친히 축문 글자를 짚어가며 틀린 데가 없는지 살피는 일을 일컫는다.

국가 행사나 제사를 지낼 때 교서관 관원은 축문을 쓴 판을 들고나오는 역할도 했다. 축판은 축문을 담당한 교서관 관원이 받들고 나오게 돼 있는데, 축문의 소임을 맡은 관원은 되도록 교체하지 않았다. 축문 작성은 매우 까다로운 점이 많아 아무나 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서관 관원들은 축문을 담당하는 것을 꺼렸다. 축문을 잘못 작성하여 벌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교서관의 축문 작성 담당자는 고정 직책으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고정 직책을 맡게 되면 승진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관원들은 더욱 축문 담당을 꺼리게 됐다.

교서관의 임무 중에는 제사에 쓸 향을 관리하고 다루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 향실별감을 따로 두었다. 향실별감은 제사 의식에 밝은 관원 6명으로 구성됐는데, 이들은 서로 교대하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 교서관에도 승려가 근무했다고?

궁궐 속에 있는 교서관에도 한때 승려가 근무했던 적이 있다. 대개 관청에 근무하는 승려들을 간사승(幹事僧)이라고 했는데, 조선 시대에 간사승을 둔 기관은 귀후소(장례 관련 용품을 공급하던 관서), 와요(기와 공급을 맡은 관서), 조지서(종이를 만드는 관서), 활인서(인쇄를 담당하는 관서), 한증소(일종의 목욕탕) 그리고 교서관이었다. 이들 기관 중 궁궐 속에 있는 기관은 교서관이 유일했다.

원래 간사라는 것은 절간 공사나 불상 조성, 불경 간행 같은 사업을 할 때 일을 주관하고 자재와 비용 공급을 담당하는 승려를 일컬었다.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는 불교 관련 업무 외에도 전염병 치료나 의료 업무 또는 장례 관련 업무, 목공, 인쇄, 제지 등에 관한 업무가 있는 관청에도 간사를 뒀다. 교서관에서는 책을 인쇄하는 업무가 있었기 때문에 간사승은 책 인쇄와 관련한 자재 공급과 인쇄와 관련된 기술적인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문종 대에 이르러 교서관의 간사승 제도는 폐지된다. 이와 관련해 실록은 문종 즉위년(1450년) 12월 9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별요(別窯, 기와를 공급하기 위한 기관)의 간사승을 폐지하는 것을 건의하는 자가 있어 혁파할 것을 청하니,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했다.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뢨다.

“귀후소를 제외하고 별요와 교서관의 간사는 모조리 혁파하소서.”

이후 영의정 하연이 논하여 아뢨다.

“아울러 귀후소의 간사도 혁파하소서.”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별요는 대신들이 혁파하고자 했기 때문에 의논하였을 뿐이며, 귀후소는 그 유래가 오래됐으므로 혁파할 수가 없다. 다만 교서관의 간사만을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

당시 간사승 제도를 혁파하려 한 것은 공물 대납 문제 때문이었다. 원래 간사승에게 공물을 대납할 권리를 줬는데, 간사승들이 공물 대납권을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세종 대에 이미 조정 대신들이 간사승의 공물 대납권을 문제 삼아 간사승 제도를 없애자고 했었다. 하지만 세종은 현실적으로 간사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의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세종이 죽자, 다시 대신들은 간사승 제도를 혁파하자고 했고, 결국 문종은 활인서와 한증소, 귀후소, 와요 등의 간사승은 남겨두고 교서관 간사승만 폐지했던 것이다.

# 3년에 한 번씩 열린 교서관의 공식 연회

조선 시대에도 관청마다 회식 문화가 있었는데, 관청에 따라서는 회식 차원을 넘어선 일종의 축제 같은 연회를 여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도 왕의 공식적인 허락 아래 왕이 내린 술과 음식으로 펼치는 연회였다.

교서관을 성균관, 예문관과 더불어 삼관이라고 불렀는데, 조선 왕들은 이들 삼관의 선비들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해마다 삼관 중 한 곳에 술과 상을 내려 연회를 열도록 했는데, 삼관이 돌아가며 3년에 한 차례씩 왕이 내린 술로 연회를 개최했다. 그 연회의 명칭이 모두 달랐는데, 예문관에서는 장미연(薔薇宴)이라 하고, 성균관에서는 벽송연(碧松宴)이라 했으며, 교서관에서는 홍도연(紅桃宴)이라 했다. 각 관청에서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은 태종 대에 그들에게 내린 선물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태종은 예문관엔 장미나무, 성균관엔 벽송을, 그리고 교서관에는 복숭아나무를 선물로 내렸기 때문이다.

이렇듯 교서관은 왕이 내려주는 술과 음식으로 3년에 한 번씩 홍도연이라는 이름으로 거창한 회식을 열곤 했다. 실록에서는 홍도연 같은 이런 연회를 왕이 해당 관청의 관원들을 위해 베푸는 사치의 일종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작가

■ 용어설명 - 축문(祝文)

신령에게 청원하는 글. 대개 독축(讀祝)의 형식을 빌려 의례(儀禮)의 맥락과 연결되며, 의례의 성격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축문은 의례의 상황에 맞게 창작되기도 하지만, 규칙화된 의례의 경우에는 기본 격식을 갖춘 축문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 근대 이후 사례 축문집이 인쇄술에 힘입어 대량으로 보급됐고, 다종교 상황의 전개로 다양한 축문집도 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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