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소설이 과학으로 규명할 수 없는 마음을 담아 [책&생각]

한겨레 2024. 2. 1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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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종말을 그린 아포칼립스 문학과 마음이 흐르는 방향을 좇는 로맨스 문학은 정조는 사뭇 다르지만 필연적으로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니, 나의 세계가 끝나는 날에도 그 사람의 세계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 하기 때문이다.

로맨스 문학은 그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의 동력을 찾는다.

"마음이 현실의 인과에 개입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을 갖는 일이 무의미할 거라 생각하진 않게 되었어요." 마음만으로는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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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증명
이하진 지음 l 안전가옥(2024)

인류의 종말을 그린 아포칼립스 문학과 마음이 흐르는 방향을 좇는 로맨스 문학은 정조는 사뭇 다르지만 필연적으로 어울리는 조합이다. 누구나 끝에 이르러서는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아니, 나의 세계가 끝나는 날에도 그 사람의 세계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 하기 때문이다. 종말 문학은 모든 것이 끝인 시점에서도 체념하지 않는 이들을 그린다. 로맨스 문학은 그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의 동력을 찾는다.

‘마지막 증명’은 ‘작가의 글’에 따르면 에스에프(SF) 로맨스라기보다는 로맨스 에스에프인 소설이다. 한국물리학회 SF 어워드 가작 수상작 단편 ‘마지막 선물’을 개고하여 확장한 경장편이다. 기술적인 논의가 담겼지만 중시계 물리학과 양자중력론에 문외한인 독자라도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무리가 없다는 면에서 하드 에스에프와 소프트 에스에프의 중간에 서 있다 하겠다.

“증명”이라는 수학 용어와 어울리게 소설의 각 장은 수학적으로 의미 있는 숫자로 이루어졌다. 0, 1, i, √2, -1, π, 자연수, 정수, 무리수와 유리수, 실수와 허수, 우주의 모든 숫자처럼 세상을 이루는 온 마음의 가치가 각 장에 그려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물리학 박사인 백영과 양서아다. 이야기는 백영이 어딘가 멀리 있는 양서아에게 답장 없는 메일을 보내며 시작한다. 2044년 2월, 백영은 집 앞에 떨어진 운석을 발견한다. 그 운석 속에 아보카도 씨앗처럼 박힌 정육면체는 우주에서 온 프로탁티늄 상자이다. 백영은 나노 로봇으로 이 물질을 탐사해보고 이것이 지구를 대파멸로 몰아넣은 웜홀을 통과해서 온 것이라고 추론한다. 우주 건너편에서 어떤 지적인 존재가, 혹은 사라진 양서아가 보낸 메시지라고.

백영이 양서아에게 보내는 연서들 사이에는 두 사람이 참여한 퍼스트 콘택트 프로젝트가 불러온 재앙이 그려진다. 외계 지성체에 연결되려고 만들어낸 인공 웜홀이 이상 웜홀이 되어 대공으로 변하고 18억명의 지구 인구가 죽는 거대한 파멸이 일어난다. 처음 본 순간부터 양서아에게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백영, 물리학 법칙에는 훤해도 사람 관계의 법칙은 파악하지 못하는 양서아, 두 사람의 엇갈리는 감정은 재난 앞에서 선명해진다. 둘은 각각 다른 우주의 공간과 시간에서 인류를 구하려는 선택을 한다. 그것은 결국 상대를 지키려는 애틋한 시도, 마음의 증명이다.

흥미롭게도 현재 한국 문학의 지형에서는 사람 사이의 감정을 가장 순진하고도 낭만적으로 다루는 장르가 에스에프라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과 상승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로맨스보다도 순수한 감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장르적 역설이 있다. 과학적 논리 위에 지어진 소설에서 과학으로 규명할 수 없는 마음이 더 중요해진다. 작가는 백영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현실의 인과에 개입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을 갖는 일이 무의미할 거라 생각하진 않게 되었어요.” 마음만으로는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다. 어쩌면 벌어질 일까지도. 그러나 백영과 양서아와 같은 이들은 꾸준하게 빛을 보낸다면, 우주 너머의 존재와 마음이 맞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 편지를 읽고 기다렸던 답장을 보내리라. 이런 믿음을 품는 사람이 로맨티시스트가 아닐 리 없다.

박현주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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