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국을 지탱하고 변혁한 ‘사소한 것’들의 힘 [책&생각]

박민희 기자 2024. 2. 1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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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베이징 남쪽 외곽 저장촌의 풍경. 글항아리 제공

경계를 넘는 공동체
샹뱌오 지음, 박우 옮김 l 글항아리 l 3만9000원

1980년대 초 베이징 남쪽 외곽에 중국 남부 저장성 농촌에서 온 이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족과 친지들끼리 가내 수공업으로 옷을 만들어 내다팔면서, 6가구의 마을이 10만명의 ‘저장촌’으로 성장한다. 이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이 활력 넘치는 공동체는 중국 전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지는 의류 생산·유통의 거대한 연결망을 발전시켰다.

저장성 출신의 베이징대 사회학과 학생이던 샹뱌오(52)는 1992년부터 6년간 이 마을로 들어가 이곳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해 석사 논문을 썼다. 2000년 ‘경계를 넘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은 중국의 국가와 사회,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촌, 통치와 저항의 역동적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고전이 되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인류학자 샹뱌오의 대표작으로, 지난해 나온 ‘주변의 상실’에 이어 한국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그의 책이다.

이 책에 공산당의 정책이나 지도자들의 거창한 정치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밤을 새워 옷을 만들고 새벽부터 시장에 옷을 내다팔며 살아가는 이주민들의 사소한 일상과 활력이 중국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추동력임을 보여준다. 1990년대 베이징 변두리, 활력 넘치면서도 혼란스러운 작업장과 좌판과 작은 상점들로 가득한 거리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개혁개방 시기 중국 사회를 세밀화처럼 보여주는 생활사다.

저장촌 공동체의 핵심에는 ‘계’(系)가 있다. ‘계’는 가족과 친구, 사업 관계가 중첩되어 만들어지는 인간관계의 연결망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계가 있고 이런 계들이 다른 사람들의 계와 겹쳐지고 연결되면서 ‘관계총’(關係叢)이 형성된다. 샹뱌오는 이 관계총이 ‘신사회공간’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서구의 개념인 ‘시민사회’와는 다르지만, 중국에서 국가로부터 일정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는 사회의 공간이 성장해가고 있음을 발견해낸 것이다. 저장촌은 중국인들은 스스로는 개혁할 수 없고 당과 국가가 지시하는 위로부터의 설계를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실천적이면서 힘 있는 반박”이었다.

이주민들은 여러 층위의 국가 통제의 틈을 찾아냈고, 정부의 철거와 단속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산업을 발전시켰다. 사회 내부의 운영 원리도 수평적이었다. 그 비결은 사람들 간의 관계였다. “누구나 돈을 벌어야 하지만 동시에 좋은 친척, 좋은 동향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수평적 발전은 매우 강한 사회 흡수 능력이 있었고 기층 민중들에게 발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저장촌’은 어떠할까. 샹뱌오는 이 책에 실린 ‘공식화의 모순, 베이징 저장촌과 중국사회 20년의 변화’(2017)에서 저장촌이 풀뿌리 공동체에서 국가 권력이 주도하는 ‘공식화’된 발전모델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대형 고급백화점이 허술한 도매시장을 대체”하고 “생산액이 수천만 위안에 수백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유한 의류기업이,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하게 자리잡고 있던 기존의 가내 수공업을 대체했다. 저장촌의 사회적 자율성, 아래로부터 스스로 조직하고 혁신하는 능력도 사라졌다.” 수평적 인간 관계의 연결망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저장촌의 거물들은 이제 앞다퉈 공산당에 입당해, 공식 권력이 부여하는 ‘당원 신분’의 후광을 얻으려 한다. 저장촌의 ‘공식화’는 민간의 자율성을 줄이고 자원을 국가에 집중하면서, 사회에 대한 분리와 차별,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향해 온 중국의 변화를 상징한다.

1990년대 베이징 저장촌의 버스 정류장. 광저우, 상하이, 톈진, 정저우 등 중국 각지로 버스가 연결된다. 글항아리 제공

중국은 이제 어디로 가게될까. 샹뱌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외부에서 주목하지 않는 중국 사회 기층의 ‘사소한 것들’의 의미를 강조한다.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사회적 삶을 영속하게 하는 핏줄이자 지속적인 사회 변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 층위를 봐야만 우리는 ‘중국’과 그 14억 인구를 단순히 최고 지도자의 틀에 갇힌 존재로 상상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삶이 바다에 띄워져 있는 작은 배에 불과해서 불어오는 바람과 밀려오는 파도에 즉시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겉보기에 중국의 모든 것이 당과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애쓰고 고민하며, 결국은 중국의 방향을 바꿔낼 이들의 힘이 존재한다. 다만 그 변화의 파도가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895쪽의 ‘벽돌책’이지만 번역이 놀랄 만큼 정확하고 매끄럽다. 이주와 국가-사회, 중국의 지역들을 깊이 연구해온 사회학자 박우 한성대 교수의 내공이 담긴 번역 덕분이다.

박민희 논설위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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