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11 계방산: 눈 쌓인 계수나무숲을 걸어가면

장보영 2024. 2. 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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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하얀 숲, 변함없는 나의 겨울
평창 용평면-홍천 내면 걸쳐 솟은 계방산
해발 1579m 우리나라 다섯번째 고산
지리적 요인 풍부한 적설량 유명세 한 몫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 고개’ 산행 시작
정상까지 꼬박 4㎞ 초입부터 반기는 흰 눈
상고대·설화 가득 백두대간 등줄기 한눈에

우주로 가는 가장 선명한 길은
눈 쌓인 계수나무숲을 지나는 길이다

▲ 계방산은 평창군 용평면과 홍천군 내면에 걸쳐 솟아 있다. 해발 1579m로 우리나라 산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

삿포로에 사는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눈이 지붕을 가득 덮은 집 앞 풍경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친구는 웃고 있었지요. ‘너의 겨울도 보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눈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생각했습니다. 지난 연말, 간밤에 대설주의보가 내릴 만큼 많은 눈이 쌓인 북한산이 떠올랐습니다. 함께 오른 사람들은 눈 쌓인 산길을 걸으며 아이처럼 좋아했지요. 얼마만의 설산이었는지 모릅니다. 바위도, 나무도, 계곡도 모두 덮은 눈 위에서 그간의 우여곡절은 잊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새해의 산뜻한 다짐을 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하루에 대한 강인했던 집념도 느슨해져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사이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추워서 잔뜩 움츠러든 채 한자리에서 몇 주를 보내는 동안 ‘겨울은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다’고 마음을 잔뜩 강퍅하게 먹었는데 또 막상 2월이 다가오며 싸늘한 강바람은 오간 데 없고 햇볕이 조금 따뜻해지자 이번 겨울이 다 지나갔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아직은 겨울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겨울은 고요히 숨어 있기 좋은 계절입니다. 숨어서 내 안의 사정을 돌아보고 바깥의 상황을 내다보면 지난 시절 사느라 바빠 미처 손쓰지 못한 일들이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하나둘 눈앞으로 걸어옵니다. 그런 일들과 마주 앉아 가만히 서로를 응시합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일들도 있고 서툰 오해를 두서없이 풀어놓는 일들도 있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누가 볼까, 들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새 계절이 도래하기 전에는 화해하고 싶은데 사무친 어떤 일들은 여전히 곁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 적설량이 풍부해 겨울철 눈꽃 산행지로 유명한 계방산

겨울의 맑고 하얀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회색빛으로 얼어붙은 도심 속 차갑고 메마른 겨울이 아니라 찬연하게 살아 움직이는 겨울의 온화한 얼굴 말입니다. 2월 4일, 달력을 보니 입춘(立春)입니다. “봄에 이른다.” 어여쁜 말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직한 절기에 찬탄하며 아직 남아 있는 겨울의 끝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실은 어디로 갈지 헤아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미 저에게는 겨울 산하면 가장 처음 떠오르는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방산(桂芳山)은 평창군 용평면과 홍천군 내면에 걸쳐 솟은 산입니다. 해발 1579m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지요. 이쯤 되면 궁금해질 것입니다. 그보다 높은 네 개의 산은 어디인지. 순서대로 소개하면 한라산이 해발 195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그다음이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 그리고 네 번째가 해발 1614m의 덕유산입니다. 높이로 우리나라 5대장이거늘 앞선 네 개의 산과 달리 왜 계방산은 국립공원이 아니냐고 의아해할 수 있는데 계방산의 일부 구역은 2011년 1월부터 오대산국립공원입니다. 계방산이 저에게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겨울 산인 이유는 스물다섯 살에 제가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오른 겨울 산이 바로 계방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많다 해도 첫사랑의 자리는 내어줄 수 없듯이 태어나서 처음 오른 겨울 산인 계방산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산악회 사람들과 열을 맞춰 이름도 낯선 산을 호기롭게 오르던 그해 겨울이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산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겨울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계방산 산행은 운두령에서 시작합니다. ‘구름 운(雲)’ 자에 ‘머리 두(頭)’ 자를 쓰는 운두령은 높이 1089m를 자랑하는 고개로, 현재 우리나라 국도 중 가장 높은 해발 고도에 자리하는 고개입니다. 그 덕에 정상까지 500m 정도의 표고만 올리면 됩니다. 등산로 입구에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 고개’라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구름도 망설인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등산로 맞은편에 자리한 작은 매점 안은 산행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분주합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들른 뒤 망설임을 거두고 산으로 향합니다.

▲ 계방산 정상. 대체로 운두령에서 올라 이승복 생가가 있는 노동리 방향으로 하산한다

운두령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 산길에 이릅니다. 정상까지는 꼬박 4㎞쯤 됩니다. 초입부터 보이는 흰 눈이 반갑습니다. 겨울 산행 명소답게 산길은 오르내린 이들의 발자국으로 단단하게 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한 길입니다. 그 까닭에 앞뒤로 늘어선 사람들과 기차놀이가 불가피해도 이제는 이조차 산을 오르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이를테면 이들이 나누는 대화 같은 것이요. 의도하지 않게 엿듣게 되는 대화에서 나와 다른 삶을 상상해봅니다. 정상에서 펼쳐질 설경을 앞두고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습니다.

계방산이 겨울 산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 산의 남다른 적설량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 산은 평창과 홍천의 경계에 솟아 있는데 영동지방의 해연풍과 영서지방의 편서풍이 계방산의 차가운 기류와 만나면서 엄청난 양의 눈을 만드는 것입니다. 대관령과 선자령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이유도 이러한 원리입니다. 수십 년 전 첫 겨울 산으로 계방산에 올랐을 때도 생애 처음 보는 상고대와 설화 앞에서 넋을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직 겨울에만 볼 수 있는, 겨울 산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 세상 유일한 하얀 나무와 꽃입니다.

한 시간 넘게 눈 쌓인 비탈을 걸었습니다. 이윽고 환하게 터지는 하늘 아래 전망대에 이릅니다. 전망대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등 뒤로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풍광에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옵니다. 발치에는 두메산골에 일군 작은 부락이 보이고 저 멀리 솟은 높은 봉우리는 머리 센 노인이 되어 우리를 굽어봅니다. 보고 싶었던 상고대와 설화는 전망대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상까지 남은 산길은 이제 겨우 1㎞입니다. 주어진 길을 아끼면서 걷습니다.

▲ 계방산의 부드러운 산세

고대하던 설국은 정상에 이르면서 완전하게 펼쳐집니다. 산정에 꼼짝없이 걸려서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멈춰 있는 구름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구름의 모습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지난 계절의 나를 봅니다. 상고대는 정상에 쌓인 돌탑 위에도 신비롭게 피어 있습니다. 날씨가 개면 북쪽으로 설악산과 남쪽으로 태백산도 보인다는데 오늘은 오리무중입니다. 흐드러진 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쏟아집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이 산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환경 활동가이자 작가인 존 뮤어는 자신의 책 ‘야생의 길을 걸어가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주로 가는 가장 선명한 길은 야생의 숲을 지나는 길이다.” 그의 말을 변주해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우주로 가는 가장 선명한 길은 눈 쌓인 계수나무숲을 지나는 길이다.” 계방산의 계(桂) 자가 계수나무를 가리킨다는 것은 상고대 핀 나무의 잎눈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겨울마다 이 산의 계수나무 사이를 오래도록 걷고 싶습니다.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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