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시험 ‘장애인 전형’서 장애 때문에 탈락…36살 나의 성장기

이정규 기자 2024. 2. 15. 09: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사건
필기시험 홀로 합격했지만 최종 탈락
4년을 보내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됐다
정신장애인 재활 당사자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벽에는 재활 당사자들의 약을 담은 약달력이 보인다. 이정용 선임기자

병원 화장실에는 문이 뚫려 있었다. 부러뜨리지 못하는 재질로 만든 칫솔을 줬고 날카로운 면도기도 빼앗아갔다. 의료진은 매번 입을 벌려서 약을 다 먹었는지 확인했다. “죽을까 봐, 그런 거 같아요.”

2010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병원에 스스로 찾아가 입원한 현승익(36)씨가 말했다. 그의 진단명은 2형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 조울증은 기분이 들뜨고 활동이 활발해지는 ‘조증’과 땅으로 꺼져 들어가듯이 우울해지는 ‘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기분장애다.

스물두 살부터 10여년간, 현씨는 조울증 치료를 꾸준히 받았다. 약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먹었고 2주에 한 번씩 동네 주치의를 찾아가 상담받았다. 2012년에는 가족에게 손 벌리지 않으려고 정신장애인 판정을 받아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했다. 대학 시절 모은 돈과 기초생활 수급비를 합하니 2018년부터는 임대아파트에서 독립해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공무원 시험은 가장 공정할 거라는 믿음,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일어나도 우울하지 않았어요. 진짜 신기했어요. 첫 목표는 도서관에 가기였어요.” 도서관에 다니며 책과 논문을 뒤져 조울증을 공부하고 몸도 관리했다. 126㎏까지 늘어난 몸무게도 어느덧 98㎏까지 줄었다.

조울증 관리가 수월해진 2020년, 현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공무원 시험이야말로 가장 공정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씨는 ‘화성시 9급 일반행정 장애인 구분모집 전형’ 필기시험에서 2020년 8월 홀로 합격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치른 면접에서 그는 정신질환과 관련된 여러 질문을 받았다. 이후 현씨는 한 차례 더 면접을 치렀고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창의력·의지력 및 발전 가능성’ 항목에서 받은 등급은 ‘미흡’이었다. “저는 정부를 되게 신뢰하고 있었거든요. 장애인 전형에서 장애를 이유로 떨어뜨린다는 건 상상도 못 했죠.”

손 들어준 대법 “고용은 차별 금지돼야 하는 핵심 영역”

불합격 통보를 받은 현씨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도움을 받아 2020년 12월 화성시 등을 상대로 ‘불합격처분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1심은 “직무 질문이 아니라 장애 질문을 면접에서 한 것은 위법하다”면서도 “추가면접에서는 장애 관련 질문이 나오지 않아 차별행위가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2심은 1심을 뒤집었다. 2심은 화성시가 현씨에 대한 불합격 처분을 취소하고 위자료 500만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판결을 지난해 12월28일 확정하며 “화성시의 처분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차별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고용은 장애인의 소득기반으로서 인격 실현과 사회통합을 위한 중요한 매개체이므로 차별이 금지돼야 하는 핵심 영역”이라고 덧붙였다. 소송을 거치며 현씨는 자신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비영리단체 한국동료지원가네트워크 대표이자 동료지원가로 일하는 현승익(36)씨가 화성시정신건강센터 앞에 서 있다. 이정규 기자.

현씨의 또 다른 직업은 비영리단체 한국동료지원가네트워크 대표다. 그는 2010년 중순부터 화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움이 필요한 정신장애인을 돕는 동료지원가로 일해왔다.

승소 경험으로 정신장애인 도우며

특수목적고를 나와 대학에 진학했지만 조현병으로 자퇴한 한 청년은 현씨에게 장애인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때는 원서를 쓰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이제는 원서를 쓰고 차별을 당한 것 같다 싶으면 소송을 걸어라 얘기 할 수 있죠. 대법원이 정의롭게 판결을 해줬으니까.”

현씨는 동료지원가가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활동 중이기도 하다. 현재 하경희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등의 도움으로 관련 조례안을 발의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정신질환 당사자들은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회복하면 자기 일을 갖고 싶어 해요. 그건 당연한 욕구예요.”

대법원 판단 덕분에 현씨는 2월 말 다시 화성시 공무원 시험 면접을 본다. 현씨에게 공무원 면접에 붙으면 9급 공무원이 될 거냐고 물었다. 합격해도 다니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다. “제가 이타적인 존재는 아니었거든요. 적당히 이기적으로 살고 자기를 지키며 살려 했죠. 그런데 막상 이렇게 당해 보니까 다른 정신장애인들이 눈에 밟히는 거예요. 이제는 세상에 스스로를 던진 느낌이에요.”

이정규 기자 jk@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