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거장 박원규 "한 치 넓이 돌에 우주 새기는게 전각"
50년前 서점서 전각책 보고
대만 이대목 찾아가 배워
'제한된 공간'에 새기는 문자
전각은 그래서 '제약의 미학'
다음책 '추사를 말하다' 준비
美구겐하임 전시 꿈도 이룰것
전각은 "방촌(方寸)의 미학"이라고 하석 박원규 옹(77)은 말한다.
방촌이란 '한 치 사방의 넓이'를 일컫는 한자어이고, 전각은 우리가 흔히 도장으로 부르는 그것이다. 손가락 한두 마디에 불과한 제한된 크기의 사각형, 그 작은 우주에서 이뤄지는 예술이 전각이다.
뭐든 그릴 수 있는 회화와 달리 정해진 수의 문자만 쓴다는 점도 전각에 제약을 준다. 한국 서예의 거인(巨人) 박원규 옹은 14일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 출간을 기념해 기자들과 만나 전각을 "제약의 미학"이라고 단언했다.
"전각은 서예가만 할 수 있지만, 서예가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예술이에요. 전각가와 소위 '도장쟁이'의 차이는 문자학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유무에서 갈립니다. 문자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전각가와 비전각가를 구분합니다."
박옹은 한·중·일 서예계의 신화적 인물로 통한다. '글자 한 점이 수천만 원'이란 설은 뜬소문이 아니다. 박옹의 1985년작 '마왕퇴백서노자임본'은 하버드대 옌징도서관이 소장 중이고,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취화선' '천년학' 포스터 글자의 주인도 박옹이었으니, 학계와 대중은 수십 년간 알게 모르게 그의 붓끝을 주시해온 것이다.
그런 박옹이 서예를 넘어 전각과 연을 맺은 계기는 1970년대 명동의 서점 '중화서국'에서 시작된다.
"익산 전주 촌놈이 그때 뭘 알았겠어요. 중화서국에 들렀다가 대만 이대목 선생의 전각작품집에 푹 빠졌습니다. 양각인지 음각인지 분간이 안 되는, 선생만의 멋이 스민 책이었어요. 그날 바로 서점 옆 대만대사관에 들어가 '그분 주소를 알려달라'고 막무가내로 청했습니다. 아직 기억이 생생해요."
대만 최고위급 전각가인 이대목은, 일면식도 없는 한국 땅의 젊은 청년에게서 '아호와 전각을 제작해주면 평생의 영광으로 알겠다'는 편지를 받고, 3년 만에 요청에 응했다. 이국땅으로 흘러 들어온 전각작품집 한 권이 맺어준 인연. 박옹은 이대목을 만나러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서예가로 승승장구하면서도, 박옹은 손가락 하나 크기의 전각에 깃든 미(美)의 질량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전각 작품 측면에 새겨지는 글자가 전각가 내면의 깊이를 드러낸다"고 박옹은 말한다. 흔한 인감도장과 예술로서 전각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서 온다. 도장 손잡이에 해당하는 사방 측면을 '구관(具款)'이라 부르는데, 4개 면에 새겨 넣은 깨알 같은 글자 몇 줄에 전각가의 깊이가 드러난다.
전각의 구관은 전각가의 깊이가 누출되는 창(窓)인 셈이다.
"전각의 격(格)은 구관에서 옵니다. 돌 옆에 새기는 글귀에 전각가의 학문적 깊이, 미학적 감각, 살아온 내력, 교우관계가 다 드러나니까요. 한국엔 구관을 제대로 새기는 전각가가 없었어요. 일본은 전각, 글씨, 그림을 나눠서 전각가는 전각만 하고 중국은 저 세 가지를 겸비하는데, 이에 비해 한국은 전각에 대한 인식이 두 나라에 비해 얕습니다."
435쪽에 달하는 이번 책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는 박옹과 그의 제자인 김정환 서예평론가의 대담으로 구성됐다. 2010년 출간된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를 잇는 두 번째 책이다. 박옹과 김 평론가가 준비 중인 세 번째 책은 '박원규 추사(秋史)를 말하다'이다. 박옹은 "서예가로서 추사를 말하는 책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고 귀띔했다.
전각과 추사 이면에서 박옹의 다음 꿈은 '맨해튼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다. 서예가 구겐하임에 입성한 적이 없으니, 성사만 된다면 세계 미술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이 기적적인 꿈에 사로잡힌 박옹을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종교지도자가 막후에서 돕고 있다. 무슬림의 아랍어와 동양의 한자는 선과 획과 점의 구성이란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동양 예술이 중동 이슬람권으로 확장될 가능성'까지 박옹은 내다보는 중이다.
"쿠란 3장 알 임란(Al Imran)의 200절 구절('참고, 견디고, 인내하라')을 써달라고 사우디에서 요청이 와서 3개월간 아랍어 교수님들께 레슨을 받아 결국 썼습니다. 올해가 77세인데 살아보니 남들이 전부 불가능하다고 말해야만 '진짜 꿈'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호랑이 꿈을 꿔야만 고양이라도 잡게 됩니다. 처음부터 고양이 꿈만 가지면 되겠어요?"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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