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이웃 찾아 오지서 진료봉사… 무욕으로 베푼 한없는 仁術[그립습니다]

2024. 2. 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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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어머니 서영옥(1919∼1993) <하>
서울 청담동 병원 시절 진료실에서의 어머니 모습. 1985년쯤일 텐데, 그립고 또 그리운 얼굴이다.

그녀는 일생 동안 남편의 병 수발과 그 뒷감당에 정성을 다했으며, 남편이 격동의 역사 속에 위태로운 국면과 파고를 헤쳐 나가는 동안 가족이 받는 충격파를 자기 안에 조용히 흡수하여 수습해 나갔다. 고난과 위기의 순간에도 그녀는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며, 한 지인의 표현에 의하면 독일인 간호장교처럼 이성적이고 침착했다.

자식들 또한 몸이 약해 위로 두 아들이 모두 때 이르게 병사했는데, 이 중 작은아들이 먼저 서른다섯의 푸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20대 초반에 시작된 폐결핵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가 그리 일찍 떠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의사여서 그랬는지 자식이 막상 숨을 거두었을 때 희한하게도 담담했다. 어느 어머니가 젊은 자식을 잃고서 눈물 한 방울 없이 그토록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그 아들이 가고 6년 후 같은 달, 위암 투병 2년 만에 아내의 뒷바라지 없이 어찌 살까 싶은 남편을 두고 먼저 떠난 걸 보면 그녀가 아들을 앞세운 후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고 지냈을지가 헤아려진다.

어머니는 그처럼 이성적이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냉정한 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그녀처럼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다감한 관심을 두루 갖는 사람을 별로 못 보았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골 병원 집 뜰에는 수십 가지 화초들이 심어져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애정 어린 손길로 가꾸어졌다. 집짐승도 개, 고양이, 돼지, 닭, 토끼, 염소, 심지어 비둘기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 그녀가 운영하던 시골 병원에서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그녀의 친척이나 친구인 양 정성이 깃든 치료를 받았다. ‘순심의원’이란 이름이 시사하듯 그 병원은 의사 주인이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열어 놓았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랑방도 되고 인생문제를 머리 맞대고 의논하는 상담소 역할도 했다. 본당의 신부님이나 수녀님들, 인근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며 어머니와 허물없이 대화하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성직자들도 가족처럼 대하는 그녀 특유의 따스함이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초, 그녀는 시골 병원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스카(橫須賀) 해군병원에서 2년간 객원 의사로 일하며 의학의 새 흐름을 익혔다. 그 후 귀국하여 서울 청담동에 조그만 내과병원을 개원하고부터 그녀의 본격적인 의료봉사 활동은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늘 좀 억울하게 생각하시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아내가 의사라서 모든 경제활동을 도맡아 하고 당신은 집안 경제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지낼 거라는 항간의 통념이 그것이다. 청담동 병원 시절부터 어머니는 병원 운영보다는 양로원, 고아원 등에 진료 봉사 다니는 데 더 열중했다.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며 경기도 지역까지 봉사를 다니느라 급기야는 허리 디스크까지 얻었다. 오래 함께 봉사하던 간호사가 덩달아 힘들고 고달팠을 텐데도 어머니 장례 때 끝까지 남아 제일 많이 애도하고 애간장이 끊어질 듯 통곡한 사람이 그이였다.

부잣집 딸로 자라난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검약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검약을 위한 검약은 분명 아니었고 자신이 검약하여 남긴 것을 모두 이웃을 도우는 데 썼다. 어머니가 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니 한숨이 나올 정도로 건질 만한 것이 없었다. 수녀 지망생이었다가 중도 포기한 경우이니 만일 뜻대로 수녀원 생활을 했더라도 청빈 문제로 어려움은 없었을 듯하다. 사실 청빈의 실천은 무욕(無慾)의 정신에서 자연스레 발현되는 덕성인 만큼 어머니는 수도자의 소성을 기본적으로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돌이켜 보아도 어머니는 정말 욕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가 세속에서 가정을 이루고 칠십여 평생을 그냥 살아내기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그녀는 끊임없이 베푸는 삶을 살았다. 대가 없이 봉사하는 의술로, 남의 과오를 덮어주고 상처를 다독이는 따뜻함으로, 사치나 허영을 부러워조차 하지 않는 소박한 심성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회심과 갱생을 위해 끝없이 견뎌주는 인내심으로….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이런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나는 늘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는 그것!

딸 구자명(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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