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트렌드의 중심, LP에 관한 고찰

리빙센스 2024. 2. 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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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 RETRO RENAISSANCE

새로운 오래된 것들에 대하여

Part 5.

레트로, 생활로 들어오다

옛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 등 건강한 문화 생태계를 만들면서 꾸준히 우상향하고 있는 레트로 트렌드. 그 흐름의 중심에는 LP가 있다.

10일 오후 8시를 넘어선 시간. 직장인이 넘쳐나는 광화문역 인근 서촌블루스. 20여 평 남짓한 LP 바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만석이다. 비좁은 바 안쪽에는 1970년대 말 보급이 시작돼 수십 년간 재즈를 잘 울리기로 소문난 JBL의 명기 4343 스피커가 북 셀프처럼 음반 사이에서 강력한 비트를 쏟아내고 있었다. 소음기로 측정하면 80~90데시벨dB 수준의 빵빵한 사운드. 2030 직장인으로 보이는 팀부터 연인들까지 MZ세대의 아지트 느낌. 끈끈한 우퍼의 울림 속에서도 샤우팅하듯 목소리를 높인 대화가 봇물 터지듯 한다. 모두 함박웃음을 머금은 표정들. LP 바가 이들의 해방 공간처럼 느껴진다. 지하철 3호선 광화문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만 이런 LP 바가 5개나 성업 중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배우고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 2010년부터 시작된 뉴트로Newtro 열풍을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2500여 년 전 동양철학이 21세기 오늘에도 적용됨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복고풍이 유행하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삶 속에 녹아드는 과정이 문화가 됐고,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5G 통신 서비스의 확산으로 음악 애호가들이 스트리밍과 영상 유튜브로 음악을 듣는 추세가 정착되고 있지만, LPlong play record 열풍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기세다. 2030세대가 LP 컬렉터로 부상하고 있고, 5060세대는 은퇴에 발맞춰 옛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LP 마니아로 변신하고 있다. 1948년 컬럼비아 레코드가 개발한 LP는 1분에 33과 ⅓을 회전하는 12인치 바이닐 판에 20여 분 분량의 음악을 녹음해서 들려주는 장치로, 1960년대 스테레오 사운드의 개발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다. CD콤팩트디스크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로 들어섰지만 2000년대 들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뉴트로 트렌드를 주도하며 지난해 미국 LP 판매 규모는 4100만 장에 달해 37년 만에 CD 판매량을 넘어섰다.

이 같은 흐름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라는 것을 방증하듯 일본 데논과 테크닉스 파나소닉 소속 등 과거 LP 플레이어 턴테이블의 명가들이 신제품 라인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데논Denon은 과거의 엔트리 모델 37F의 흥행에 버금가는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10만원대부터 수백만원대까지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특히 음악 DJ들의 사랑을 받던 테크닉스는 과거의 명기 SL-1200 라인을 부활한 SL-1210G 등 라인과 함께 최근 2990만원에 플래그십 모델 SL1000R 시판에 들어갔다.턴테이블 명가인 독일 토렌스Thorens를 비롯해 클리어 오디오Clearaudio, 미국 맥킨토시McIntosh, 영국 레가Rega, 린Linn, 스위스의 프로젝트오디오Project Audio 등 전통적인 하이파이 명가들도 꾸준하게 신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과거 LP 대중화를 이끌었던 일본 업체들인 데논과 티악, 야마하, 에소테릭 등도 턴테이블 신작을 쏟아내는 분위기다. 덩달아 LP의 음골을 읽어주는 눈과 같은 카트리지를 제조하는 덴마크 오토폰Ortofon과 영국 골드링Goldring, 일본의 수미코Sumiko 등 전문 업체도 전성기에 버금가는 호황을 만끽하고 있다. 국내 LP 열풍을 일찍이 간파하고 문화 트렌드로 선도한 기업은 현대카드다. 지난 2015년 현대카드는 용산구 이태원동에 국내 최대 음반 매장 바이닐앤플라스틱Vinyl&Plastic, V&P을 선보였다. 수백 장의 각종 음반을 현장에서 직접 들어볼 수 있도록 설계한 체험형 공간이다. V&P가 문을 열 당시에는 갈등도 많았다. 전통 중고 LP 장터로 명맥을 이어온 회현동 지하상가와 용산전자상가 LP 상인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 현대카드는 중고 LP 대신 리이슈reissue와 신 발매 음반만을 판매하기로 하고 V&P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업으로 본 것이 아니고 문화로 바이닐을 봤다는 얘기다. 다양한 글로벌 문화에 관심이 많아 '슈퍼콘서트' 등 톡톡 튀는 컬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LP 열풍은 오프라인을 넘어 온라인에서까지 파죽지세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LP를 구하려면 황학동 중고시장이나 용산 전자랜드, 회현동 지하상가의 몇 군데 숍을 뒤져야만 했다. 당시는 구 소련 붕괴와 함께 유럽에서 쏟아져 들어온 중고 LP가 시장을 주도했다. 국내 LP 제작업체도 모두 문을 닫았을 정도. 회현동 지하상가에 자리 잡았던 옷가게와 귀금속 매장들이 하나 둘 LP 판매점으로 전업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신촌까지 영역이 확대됐다.

온라인 서점들은 신 발매나 리이슈 음반 판매의 채널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예스24와 알라딘 등 온라인 서점에서 LP와 CD는 중요한 판매 상품으로 부상했다. BTS와 아이유 등 글로벌 스타들의 LP는 발매와 함께 매진 행렬이다. 실제로 중고 가격이 100만원을 넘어섰던 아이유의 음반 <꽃갈피>는 지난해 7월 팬카페 유애나 6기를 대상으로 한정 제작한 4만 장이 하루 만에 동나기도 했다. 마에스트로 열풍을 이끈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러 시리즈 LP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발매와 함께 매진을 기록했다.

BTS와 아이유 등 2030 팬덤이 이끄는 LP 열풍은 5060으로도 확산하는 추세다. 가왕 조용필을 비롯해 송창식, 김창완 등 1970년대 이른바 통기타 음악을 선도했던 가수들의 음반 리이슈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사전 예악에도 불구하고 상당 수의 LP는 한정판이라는 특징 때문에 발매와 함께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초판 음반을 리마스터링 한 리이슈 음반을 확보하려는 열풍이 불기도 했다.

트로트계의 영웅 임영웅의 목소리가 들어간 <내일은 미스터트롯 진선미 베스트> 음반은 6070 팬심을 사로잡아 발매와 함께 완판됐다. 이와 함께 클래식 열풍을 만든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조성진 열풍도 LP 시장에 상륙했다. 10여 종에 이르는 두 사람의 연주 음반은 대부분 품절 상태다.

온라인에서는 LP에 대한 정보를 얻고 즐기려는 분위기도 확산 중이다. 네이버의 대표 오디오 카페인 '두근두근오디오'에는 하루에 수십 명의 신규 회원이 "LP에 관심이 생겨서 가입했다"는 인사와 함께 새롭게 참여하고 있다. 2015년 개설된 이 카페는 현재 12만 명의 회원을 확보해 네이버 평가 최고 등급인 '숲'으로 등극했다. 실제 3개월 활동 점수를 보면 지난해 9월 29만 점에서 지난해 말에는 35만 점으로 높아졌다.

LP 열풍은 확고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로운 발전이라는 점에서 LP 마니아의 확산은 긍정적인 문화 효과를 발휘할것으로 기대된다. LP에 대한 관심이 세대와 무관한 추세라는 점, 아날로그적인 음악을 즐기려는 분위기와 함께 '소장 가치'에 대한 수요가 꾸준하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옛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 등 뉴트로 트렌드는 건강한 문화 생태계를 만들면서 꾸준히 우상향하고 있는 셈이다. 뉴트로 열풍에 합류해 새로운 문화를 즐기며 작은 행복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CREDIT INFO

editor조영훈 <리빙센스> 본부장

photographer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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