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달맞이꽃의 수줍은 고백, 대기오염에 막혔다

이영완 과학에디터 2024. 2. 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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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피는 꽃의 향기 성분, 오염물질에 분해돼
꽃가루받이하는 나방의 꽃 방문 70% 줄어
꽃향기 감지거리도 2㎞서 수백m로 감소
나방 안 오면 열매 量 줄어 생태계에 피해
자동차 배기가스가 나오는 가운데 흰독말풀의 꿀을 먹는 박각시나방. 배기가스는 박각시나방의 후각신경에 혼동을 줘 꽃 향기를 찾지 못하게 한다./미 워싱턴대

‘첫여름 하얀/달밤이 되면/그만 고백해 버리고 싶다/그대 내 사람이라고…입으로 부르면/큰일 나는 그 사람/하르륵! 향기로 터뜨리고 싶다.’

다들 화려한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뽐내지만, 마음에 담은 이를 부르지도 못하는 아련한 사랑도 있다. 문정희 시인은 이렇게 애타는 마음을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밤이 돼서야 비로소 은은한 향기를 내는 달맞이꽃에 빗댔다.

달맞이꽃은 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다. 이름 그대로 달이 뜨는 밤에 꽃이 핀다. 벌과 나비도 잠든 밤에 피다 보니 꽃가루받이는 야행성 곤충인 나방이 맡는다. 보통 나방이라고 하면 불빛에 몰려드는 기분 나쁜 곤충을 떠올리지만, 도심에 사는 식물의 3분의 1이 꽃가루받이를 나방에 의존하고 있다.

묵묵히 생태계에서 제 몫을 하던 나방이 위기에 빠졌다. 도시의 대기오염에 밤에 피는 꽃이 내는 향기가 갈수록 약해지면서 나방이 길을 잃은 것이다. 나방이 밤에 꽃가루를 옮기지 못하면 꽃이 결실을 얻지 못하고, 그 열매에 기대 사는 다른 동물들도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달맞이꽃을 찾은 멋쟁이박각시나방./미 워싱턴대

◇대기오염이 밤에 피는 꽃의 향기 분해

미국 워싱턴대 생물학과의 제프 리펠(Jeff Riffell) 교수와 대기과학과 조엘 손튼(Joel Thornton) 교수 연구진은 지난 9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대기오염 물질인 질산염 라디칼(radical)이 밤에 피는 꽃에서 나오는 향기 분자를 분해해 나방이 꽃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라디칼은 공유결합을 하지 못한 홀전자를 가져 불안정한 상태의 원자나 분자를 말한다. 유리기(遊離基)라고도 한다. 다른 원자나 분자의 전자를 빼앗아 안정된 상태로 가려는 성질이 있어 인체에서 세포나 DNA를 손상할 수 있다.

연구진은 시애틀에서 약 280㎞ 떨어진 풀밭에서 달맞이꽃이 내는 향기를 채집했다. 꽃향기에서는 22가지 화학성분이 검출됐다. 연구진은 박각시나방(학명 Manduca sexta), 멋쟁이박각시나방(Hyles lineata)이 이런 향기 화합물에 노출될 때 더듬이에서 나타나는 전기신호를 확인했다. 나방들은 여러 화학성분 중 모노테르펜(monoterpene)이라는 성분에 특히 민감했다. 모노테르펜은 침엽수에서 많이 나오는 물질이다.

다음은 달맞이꽃 향이 대기오염 물질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알아봤다. 연구진은 화학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인조 달맞이꽃 향을 만들고, 대기오염 물질인 오존과 질산염 라디칼을 첨가했다. 산소 원자 3개로 이뤄진 오존은 햇빛이 있을 때 형성돼 낮에 풍부하고, 질소와 산소 원자로 이뤄진 질산염 라디칼은 햇빛에 분해돼 밤에 더 많다. 인조 향에 오존을 첨가하자 두 가지 모노테르펜 성분의 농도가 30% 줄었다. 질산염 라디칼을 추가하자 감소율이 84%까지 증가했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에 질산염 라디칼이 치명적이라는 의미다.

박각시나방이 인조 달맞이꽃에서 꿀을 빨고 있다. 원래 향기를 합성해 뿌리면 전처럼 나방이 꽃을 찾았지만, 대기오염 물질에 분해된 향기를 내면 방문 횟수가 크게 줄었다./미 워싱턴대

연구진은 종이로 만든 달맞이꽃에 인조 향을 뿌렸다. 나방들은 꽃을 찾아 날아들었다. 하지만 질산염 라디칼에 모노테르펜이 분해된 향을 뿜자 나방들이 주춤했다. 박각시나방의 꽃 방문율은 50% 줄었고, 멋쟁이박각시나방은 더 이상 꽃을 찾지 않았다. 연구진은 오존만 추가하면 나방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야외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질산염 라디칼에 분해된 향기를 방출한 꽃은 나방 방문 빈도가 다른 꽃보다 70% 낮았다. 자연에서 나방은 밤에 꽃마다 평균 두 번씩 방문하지만, 질산염 라디칼에 분해된 향기를 방출하자 방문 횟수가 이틀에 한 번으로 줄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어떤 나방은 꽃향기를 전혀 맡지 못했다. 리펠 교수는 “마치 나방이 코로나에 걸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꽃향기 퍼지는 거리가 5분의 1로 줄어

과학자들은 지난 20년간 인간이 지구의 생물과 대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를 인류세(人類世)란 새로운 지질시대로 분류했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와 대기오염이 생명체 간의 화학적 통신을 유발하는 자연 향기 분자에 미치는 영향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호주 서던 퀸즐랜드대의 생태학자인 로비 걸링(Robbie Girling) 교수는 이날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꽃가루받이 곤충에 의존하는 농작물과 생태계에 질산염 라디칼은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대 리펠 교수는 “나방이 찾는 횟수가 줄면 열매 양이 28% 감소한다”며 “이로 인해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컴퓨터 시뮬레이션(가상시험)을 통해 전 세계 도시에서 대기오염으로 인해 꽃가루받이 곤충들이 꽃향기를 감지하는 거리가 75% 이상 감소한 것을 확인했다. 나방이 밤에 달맞이꽃의 향을 감지하는 거리가 2㎞에서 불과 수백m로 줄어드는 식이다.

앞서 워싱턴대 연구진은 지난 2014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대기오염이 꽃향기마저 바꿔 곤충과의 통신을 교란한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다른 꽃향기가 강하면 흰독말풀 향기를 처리하는 신경 신호가 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자동차 배기가스도 이런 효과를 냈다. 자동차 배기가스는 박각시나방의 후각을 교란하는 잡음이 된다.

이후 대기오염 물질 중 구체적으로 어떤 성분이 나방의 후각을 교란하는 주범인지 밝히는 연구가 잇따랐다.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 연구진은 지난 2020년 국제 학술지 ‘화학 생태학 저널’에 오존이 나방의 후각을 교란한다고 발표했다. 오존은 산화 반응을 유발하는 오염물질로, 인간에게 호흡기 질환을 유발한다.

연구진은 먼저 꽃향기를 분석했다. 오존이 있을 때 향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확인했다. 다음에는 인위적으로 바람을 불어주는 풍동(風洞) 장치에서 나방이 원래 꽃향기와 오존으로 변형된 꽃향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했다.

이전 꽃향기가 나오면 나방이 그쪽으로 날아가 빨대 같은 주둥이를 뻗었다. 하지만 오존에 산화된 꽃향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워싱턴대 연구진은 밤에는 질산염 라디칼이 오존보다 더 나방의 후각을 교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레이철 카슨은 1962년 저서 ‘침묵의 봄’에서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면 봄이 와도 새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카슨의 경고는 현실이 됐다. 새는 물론, 꿀벌이 나는 소리까지 줄었다. 머지않아 여름 밤마저 나방이 날아다니고 달맞이꽃이 열리는 소리가 사라지는 침묵에 빠질지 모른다.

풀밭에서 현장 실험을 하고 있는 제레미 챈 박사. 사이언스 논문의 제1 저자로 현재 이탈리아 나폴리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연구하고 있다./미 워싱턴대

참고 자료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i0858

Journal of Chemical Ecology(2020), DOI: https://doi.org/10.1007/s10886-020-01211-4

Science(2014), DOI: https://doi.org/10.1126/10.1126/science.125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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