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연기 안돼 황진이役 놓쳤는데… 이제는 ‘正歌 여신’ 이래요”

이태훈 기자 2024. 2.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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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 성악 정가 보컬리스트
무형문화재 가곡 이수자 하윤주
음악극 ‘적로’ 속 극작가 배삼식의 시(詩)적 대사와 노래는 하윤주의 청아한 정가 창법과 만나 독특한 매력을 빚어낸다. 지난 1일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극중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하윤주. /김지호 기자

지난달 말 공연계 사람들의 소셜 미디어 타임 라인은 온통 국립국악원에서 공연되던 ‘적로-이슬의 노래’(이하 ‘적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우리 전통 성악 정가(正歌)를 기본으로 판소리와 국악 연주가 어우러지는 음악극.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배삼식의 극본, 뮤지컬 작곡가이기도 한 최우정 서울대 음대 교수의 음악, 안무가 정영두의 연출로도 화제였지만, 놀라움의 중심엔 주인공 ‘산월’을 연기했던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하윤주(40)가 있었다.

지난 1일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정가 보컬리스트’ 하윤주는 자신의 단아한 정가 음색처럼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아직 부족한 것 투성이예요. 모자라는 부분들 열심히 채워나가며 가능성을 키우다 보니 이제야 기특히 여겨주시는 분들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시조, 가곡, 가사 등을 가리키는 정가(正歌)는 판소리와 민요 등 민속악과 구분되는 궁중과 양반 계층의 음악. 그는 여전히 겸손하지만, 음악극 ‘적로’와 그의 정가를 아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윤주의 별명은 이미 ‘정가 여신’이다. 그는 “공연 때 ‘여러분, 사람들이 저더러 정가 여신이래요’ 하면 관객 분들이 마음을 열고 웃어주신다. 그렇게 소통할 수 있는 애칭을 갖게 됐으니 그것도 영광”이라고 했다. “정가는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특유의 소리가 개성 있어요. 길게 뻗어나가는 모음과 격조 있는 시김새(꾸밈음)도 정가만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2024년 2월 1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음악극 '적로-이슬의 눈물'의 주연을 맡은 가곡 무형문화재 이수자 하윤주씨가 포즈를 취했다. /김지호 기자

판소리 창극이 교향악이라면, ‘적로’는 실내악처럼 간결한 매력이 있는 작품. ‘적로’ 속 정가 창법의 노래들을 듣다 보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덕에 이 음악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하윤주가 정가(正歌)의 정석에 가까운 노래로 두 남성 소리꾼의 판소리와 번갈아 객석을 휘어잡는 초반부를 지나면, 뒤로 갈수록 좀더 서양가락이 가미되면서 뮤지컬에 가까운 분위기로 극을 고조시킨다. 우리 소리 음악극이 보여주는 정서적 힘이 놀랍다.

‘적로’는 일제강점기 대금 산조의 창시자 박종기(1880~1947)와 이왕직 아악부의 스타 대금 명인 김계선(1891~1943), 두 전설적 음악가가 함께 사랑했던 기생 산월이의 환생 같은 여인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 2017~2019년 돈화문국악당에서 매 연말 공연에 이어, 올해까지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국립국악원 소극장 풍류사랑방의 객석 점유율은 매진에 가까운 95.4%. 지난 3일 국립 부산국악원 예지당에서 열린 두 차례 공연도 오후는 완전 매진됐고 저녁에도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적로’는 극중 반복돼 등장하는 맺힌 이슬[滴露]이며, 대금(젓대)에 맺힌 숨[笛露]인 동시에, 박종기가 마지막까지 피리를 불다 숨이 끊어졌을 때 피리에서 뚝뚝 떨어졌다는 붉은 피[赤露]이기도 하다. 제목 자체가 덧없는 인연과 인생, 영원한 소리와 음악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음악극 ‘적로’ 속 극작가 배삼식의 시(詩)적 대사와 노래는 하윤주의 청아한 정가 창법과 만나 독특한 매력을 빚어낸다. 지난 1일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극중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정가 보컬리스트 하윤주. /김지호 기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윤주의 길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국악원 정악단 준단원 시절, 황진이 이야기를 다룬 가극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연기와 춤이 부족해 중도 탈락했었다”며 웃었다. “예술감독님이 ‘너를 무대에 세울 수도 있지만, 네 경력에 큰 오점이 될 수 있다’며 중간에 그만두게 해주셨어요. 큰 실패가 약이 됐어요. 그때부터 연기 공부도 하고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전통 무용도 다시 배웠으니까요.”

오디션을 거쳐 참여한 음악극 ‘적로’가 그의 인생 행로를 바꿨다. “’적로’를 통해 더 많은 분이 정가의 매력을 알아봐 주셨죠. 2019년 솔로 앨범 ‘추선(秋扇)’을 냈고 공연 기회도 더 늘어났어요.” KBS 특집 드라마에 주역으로 출연했고, TV의 여러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나갔다. 지금 그는 국악과 양악이 협업하는 크로스오버 장르의 가장 핫한 보컬리스트다.

원래 정가는 ‘국악하는 사람이 100명이면 90명은 악기를 하고, 남은 10명 중에 3명은 판소리를 하고, 딱 1명만 정가를 한다’고 할 만큼 외로운 분야. 그는 “지금도 외롭고 힘들다. 힘든 시기를 얼마큼 참고 견딜 수 있느냐, 버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도 했다. “이 음악으로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학창 시절, ‘네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 사람들이 꼭 너를 음악가로서 알아봐줄 것’이라고 힘을 북돋워주신 스승님들 덕분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꿋꿋이 정가를 지키고 알리려 합니다.”

음악극 '적로'는 조선말~일제강점기 전설적인 대금 명인이었던 '김계선(정윤형·왼쪽)'과 '박종기(이상화)', 두 음악가가 사랑했던 여인 '산월(하윤주)'의 이야기다. /업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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