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엣의 집에서 줄리엣의 왈츠를

2024. 2. 1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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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 아디제 강변에 자리 잡은 베로나는 쾌적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환경을 자랑하는 인구 25만 정도의 소도시다. 베로나는 고대 로마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기도 하다. 베로나의 심장인 에르베 광장은 고대 로마 시대의 정치종교 문화 경제의 중심이던 포룸이 있던 자리이다.

그런가하면 시내 중심가에 로마제국 시대에 세워진 원형극장과 아디제 강변 언덕 기슭에 세워진 반원형 극장의 유적은 오늘날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름이 되면 원형극장 유적에서는 오페라가 공연되고, 반원형 극장 유적에서는 연극이 공연된다.

로마제국 시대 초기에 세워진 원형극장 아레나의 유적.

반원형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단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 시가지 중심부에는 중세 베로나를 황금기로 이끌었던 스칼라 가문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는 스칼라 가문이 통치할 때인 13세기의 베로나가 배경이 된다.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쓴 것은 1591년과 1595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이전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는 이미 있었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보통 이야기를 처음부터 새롭게 지어내는 것보다는 주어진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데 뛰어났다. 즉, 그는 다른 작품들로부터 소재를 빌려와 자기 의도에 맞추어 그것을 자르고, 붙이고, 늘리고, 빈틈을 메우곤 했던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3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명은 <줄리엣타와 로메오>, 작가는 베로나 근교 도시 비첸차 출신의 루이지 다 포르토(1485-1529)였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은 후에 이탈리아 작가 브란델로에 의해 다시 정리되었고 프랑스어로 번역된 다음 영국으로 전해져 영국 작가 브루크에 의해 1562년경에 운문으로 다시 손질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이것을 토대로 5막의 희곡으로 재창조하면서 ‘조연급’ 등장인물을 더 넣고 또 극의 구성을 극대화했던 것이다.

베로나의 심장 에르베 광장.

사람들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이야기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은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그중에서 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1818-1893)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이 크게 돋보인다. 프랑스어 제목은 Roméo et Juliette.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끌렸던 구노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오페라화 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1860년대 중반이 되어서였다. 그는 기본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을 거의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충실했다. 이 오페라가 1867년 4월 27일 파리의 극장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첫 공연에서 성공한 이후 이 작품은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레퍼토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는 줄리엣이 부르는 “Je veux vivre dans ce rêve.”, 즉, ‘이 꿈속에서 살고 싶어라’인데 보통 ‘줄리엣의 왈츠’라고 한다. 오페라의 1막에서 줄리엣의 부모는 저택에서 무도회를 주최하는데 이 무도회에  파리스 백작이 참석했다. 그는 젊고 잘생기고 집안 좋고 돈도 많은 귀족이다. 줄리엣은 열네 살이 채 안됐지만 부모는 줄리엣에게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라고 한다. 또 유모까지 나서서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라고 한다. 하지만 줄리엣은 아직은 결혼에 관심 없고 꿈꾸는 시절을 즐기고 싶다면서 이 아리아를 부른다.

한편 원수가문의 아들 로미오는 가면을 쓰고 이 무도회에 잠입했다가 줄리엣에게 눈길을 빼앗기는데 줄리엣의 독백을 몰래 엿듣고는 용기를 얻어 그녀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줄리엣의 집 입구.

이 사건의 현장은 베로나 시내에 보존되어 있다. 에르베 광장과 연결된 비아 캅펠로 23번지에는 허름한 붉은 벽돌로 된 커다란 아치가 있고, 그 옆에는 이탈리아어로 카자 디 줄리엣타라고 적힌 푯말이 보인다. ‘줄리엣의 집’이다.

아치 입구 안쪽 벽에는 갖가지 사랑의 사연을 담은 낙서로 가득 차 있고 안뜰에는 많은 사람들 틈으로 갸름한 모습의 줄리엣 동상과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좋을 발코니가 보인다. 줄리엣의 집에 잠입한 로미오는 발코니에 나와 있는 줄리엣을 보고 “앗, 저기 창문으로 퍼져 나오는 빛은 무엇일까? 저쪽은 동쪽, 그렇다면 줄리엣은 태양일까?”라고 하는데 실제로 발코니는 이 대사처럼 동쪽이다.

줄리엣의 동상과 발코니가 있는 줄리엣의 집 안뜰.

그렇다면 이 집이 정말로 줄리엣이 살았던 집일까? 정답은 ‘아니오’다. 이 집은 폐가가 되다시피 한 어느 13세기의 저택을 20세기 초에 그럴싸하게 복원하여 꾸며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집을 한번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랑의 순례자들이 베로나로 몰려오고 있다.

그러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일까? 글쎄…이런 이야기는 13세기의 베로나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던 사건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을 기초로 해서 창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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