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라는 어리석은 환상, 세상 바꾸는 좋은 착각 [세상읽기]

한겨레 2024. 2. 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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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게티이미지뱅크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종교학)

선친께서는 해마다 이맘때면 이런 곡조를 흥얼거리곤 하셨다.

“묵은해니 새해니 구별할 것 없네/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여보게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변해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아버지는 주로 뉴스 화면에 양력설을 맞아 전국의 산과 바다로 해맞이를 떠나는 인파가 비칠 때, 그리고 음력설 전날 큰집으로 가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셨다. 하기야 해돋이를 보고 싶다면 한해 중 언제라도 날씨 좋고 사람 덜 붐빌 때 움직이는 쪽이 편할 터다. 멀리 떨어져 사는 친지들이 미어터지는 귀성길을 뚫고 명절 기간에 맞춰서 모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극히 세속적인 현실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이 노래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듯 몇번이고 부르셨고, 그럴 때면 나는 모처럼의 새해 기분이 식어가는 게 불만이었다.

이 범상치 않은 가사의 노래는 장사익의 ‘꿈속’이다. 그 원전은 조선 말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활동한 승려 학명(鶴鳴)의 선시인 ‘몽중유’(夢中遊)다. 원래의 시는 기본적으로 장사익의 노래와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 더 전통적인 불교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차이가 눈에 띈다. “덧없는 인생이 스스로 지은 꿈속에서 놀고 있네(浮生自作夢中遊).” 가요 버전과 비교해 보면, 연속적인 시간을 한해의 끝과 시작으로 나누는 분별심이 가지는 어리석음을 덜 강조하는 대신, 분절된 시간이라는 환상이란 다름 아닌 인간 스스로가 지어내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꿈이라는 통찰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해가 지나가 영원히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는 ‘꿈’은 사실 꽤 유용하다. 이전까지의 방탕한 삶을 지워버리고 금연, 금주, 운동,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기에 새해라는 ‘환상’은 나쁘지 않은 계기다. 비록 그 결심의 유효 기간은 일반적으로 3일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런 작심(作心)의 기회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급속히 소모될 것이다.

대선이나 총선으로 구획되는 정치적 시간은 사회의 폭력적인 전복을 막는 중요한 기제다. 많은 대의제 사회에서 선거란 선택지가 대단히 적을 뿐 아니라 완벽한 정답도 없는 객관식 문제 풀이와 같다.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한들 삶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드물고, 최악의 선택을 한다 한들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극도로 저질스러운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해 일상의 구조적 고통이 가중될 때면, 언젠가 이 정권의 시간이 종말을 맞이하고 새로운 미지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이 움튼다.

시간에 끝과 시작이 있다는 상상이 있기에 인간이 삶의 고통을 감내해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핵심적인 주장이기도 했다. 그는 전근대의 인류가 여러가지 종교적 테크닉을 사용해 시간을 지배하려 했음을 보여줬다. 엘리아데는 신화나 의례로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고,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는 감각은 근대적 역사관을 가진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것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흘러간 시간을 되살거나 새로운 시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상상을 버리지 않았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점을 집단적으로 되풀이해서 살아가려는 시도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억은 일방적으로 허무하게 흘러가는 역사를 거스른다. 6월25일이라는 날짜는 반공주의적 적개심을, 5월18일이라는 시점은 민주주의를 향한 영원한 전진이라는 열망을 갱신하는 기념일들이다. 또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4월16일과 10월29일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날들이 되었다. 그래서 시간을 분할하고, 특정한 시점을 다시 체험하며, 그로부터 새로운 날들을 시작하는 일련의 작업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시키기도 하지만 세상의 뒤틀림과 어긋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집단적 꿈을 꾸고 있다.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을 때 인간은 어리석지 않다. 묵은해의 마지막은 새해의 시작과 물리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새로운 시간이라는 환상은 개인의 삶을 바꾸기에도, 세상을 변혁하기에도 좋은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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