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실사가 기업 다 죽인다? 아니,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한겨레 2024. 2. 1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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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13일(현지시각)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럽의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조선희 | 법무법인 디라이트 파트너 변호사·경기도사회적경제원 이사

미국은 2020년 아동노동 착취와 강제노동을 이유로 말레이시아 기업이 생산한 팜유 수입을 금지시켰다. 2022년에는 ‘위구르족 강제노동금지법’을 제정해 중국 신장 지역에서 생산된 옷(면), 태양광 패널, 배터리 소재 등의 수입을 금지했다. 이런 종류의 원재료나 부품을 포함한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은 신장 지역이나 말레이시아의 해당 기업에서 생산된 원재료 등이 최종 제품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한다.

강제노동 문제가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정신지체 장애인을 섬으로 유인한 뒤 감금·폭행으로 강제노동을 시킨 ‘염전 노예 사건’을 볼 수 있다. 또한 농어촌에서 일하는 많은 이주노동자가 농장주에게 여권을 빼앗기고 일터인 논과 과수원 옆에 있는 열악한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면서 하루에 14시간 넘는 중노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만약 미국에서 이러한 사건을 주목해 수출금지 법안을 만들 경우, 국내 수출기업들은 이들 지역에서 나오는 원재료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반인권 이슈뿐만 아니라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 리스크 역시 기업 경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무역장벽이다. 이로 인해 기업들은 반인권 이슈를 방지하고 환경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자체적으로 공급망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공급망이란 최종 제품 생산 및 공급을 위해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업들이다. 주로 원재료 공급업체, 하도급업체 등의 협력사를 지칭한다.

그런데 유럽연합(EU)에서는 지난해 6월 ‘기업의 지속가능한 공급망 실사 지침’(CSDDD)이 유럽의회를 통과했고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국내법으로 공급망 실사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이 지침은 기업들로 하여금 협력사의 인권 현황, 환경 오염을 자체 조사해 리스크로 관리할 것을 의무화하는 게 골자다. 그동안 기업의 재량 사항이었던 공급망 실사가 법률상 의무가 된 것이다.

이를 놓고 일부 국내 언론이 ‘공급망 관리가 수출기업, 중소기업 다 죽인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기업은 이런 자극적 제목에 미리 겁먹을 필요가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급망 실사는 기업이 법률적인 의무사항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여부를 중점적으로 검사하는 ‘규범적 실사’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공급망 실사를 시행할 ‘주체’인 대기업·글로벌기업과 실사를 받는 ‘대상’인 수출기업·협력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을 나눠 살펴보자.

우선 대기업이나 글로벌 기업 등은 공급망 실사를 위해 공급망 관리를 시스템화할 필요가 있다. 많은 대기업이 협력사와 거래 시, 계약서뿐만 아니라 불공정행위 방지를 위한 이해충돌 여부를 스스로 점검하고 상생협약서, 청렴서약서 등을 체결하고 있다. 이는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약관규제법, 가맹사업법 등에서 ‘갑’의 지위에 있는 원청(도급인)에게 계약서에 반드시 서면으로 체결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이 계약서 등에 없을 경우 관할 관청으로부터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공급망을 관리해야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공정거래법 등의 관련 규정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공급망 실사를 받는 수출기업과 협력사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가운데 탄소 배출량과 관련된 환경 영역과 인권, 노동을 포함한 사회 영역에 집중해 대비해야 한다. 환경 영역은 주요 실사 대상이 탄소 배출, 에너지 사용, 물 사용, 오염물질 배출, 폐기물 처리와 같이,측정·계산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돼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시행된 탄소세의 일종인 탄소국경조정제(CBAM)를 생각하면 탄소 배출량 관리가 얼마나 시급한지 알 수 있다. 탄소 배출량을 인식하고 이를 관리한다는 것은 기업의 자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수준을 가늠할 기본 사항이자, 공급망 실사에 대한 대응 수준을 판단할 기초자료에 해당한다. 다행히 최근 탄소 배출량을 자동으로 산출하는 서비스를 개발하는 업체들이 많아 조만간 기업의 탄소 배출량을 쉽게 산출하는 것이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할지라도 기업은 최소한탄소 배출량 산출을 위해 필요한 자료와 그 구체적 산출방법에 대해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또 다른 공급망 실사의 핵심은 인권, 노동 위주로 구성된 사회 분야 리스크를 잘 관리하는지 여부다. 흔히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측면에서 ‘한번 걸리면 회사가 회복하기 어려운 평판 손실을 입게 되는 이슈’로 두 가지를 꼽는데, 하나는 ‘모성 보호’이고 다른 하나가 ‘장애인’ 이슈다. 아직도 많은 중소기업은 남녀고용평등법이나 근로기준법상의 모성 보호 규정을 취업규칙 등에 반영하는 것을 저어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정도가 더 심해서 이를 중소기업의 취업규칙 등에 반영하려는 담당자는 “승진을 포기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다. 그러나 모성 보호나 장애인 이슈는 한번 발생하는 것만으로 회사 존폐와 직결하는 중대한 리스크에 해당한다. 현재 대부분의 중견기업·대기업은 장애인고용촉진법에 따라 장애인을 일정 비율 이상 고용해야 하는 의무기업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중견기업·대기업은 작업 수행과 일반 사내 생활에서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업무지침이나 가이드라인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또한모성 보호와 관련해서는 ‘육아휴직, 단축근무 등을 이유로 불이익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취업규칙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 영역에서 추가로 중요시되는 것은 근로자의 ‘안전보건’이다. 지난달 27일부터 5인 이상 사업장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고 있다. 소규모 사업장에 해당하는 중소기업일지라도 중대재해 예방 및 발생 시 대처방법을 명시한 중대재해 대응 매뉴얼을 갖출 필요가 있다. 또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주는 업종이나 사업장 규모와 관계없이 위험성 평가를 해야 한다. 위험성 평가란 사업장 내 유해, 위험요인을 확인한 뒤 개선책을 마련해 시행하고, 그 결과를 정기적 혹은 수시로 점검한 뒤 추가 개선책을 시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사업주가 중대재해처벌법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제대로 이행했는지를 판단할 때, 위험성 평가를 정기적으로 실시했는지 여부가 주요 판단 기준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기업이 환경·사회와 관련해 법률이 요구하는 필수사항을 얼마나 충실히 준수하고, 리스크로 관리하는지가 공급망 관리의 핵심이다. 현재 기업의 규모와 기업이 속한 산업군에 따라 환경·사회 분야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법률적 사항을 파악하고, 이를 갖추는 것부터 시작하면 공급망 실사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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