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사제, 동성커플 첫 축복…교황청 승인 한달 만에

채윤태 기자 2024. 2. 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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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지난해 12월 승인 이후 처음
두 커플 축복해준 이승복 신부
“주님의 축복, 어떤 이도 배제되지 않는다”
2021년 5월9일, 독일 뮌헨의 성 베네딕토 성당에서 가톨릭 사제가 동성 부부를 축복하고 있다. 뮌헨/AP 연합뉴스

천주교 글라렛 선교수도회 이승복 라파엘 신부가 지난달 20일 두쌍의 동성 커플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교황청이 지난해 12월 동성 커플이 원한다면 가톨릭 사제가 이들에 대해 축복을 집전해도 된다고 승인한 이후, 국내 가톨릭 사제가 동성 커플을 축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톨릭 성소수자 앨라이(지지자) 단체인 ‘아르쿠스’는 지난달 20일 이 신부가 아르쿠스 공동대표인 크리스씨와 배우자 아리씨, 그리고 또 다른 동성 커플인 유연씨와 윤해씨를 축복했다고 12일 밝혔다.

축복 기도를 받은 크리스·아리 부부는 2013년, 대한민국 국적을 지녔지만 캐나다에서 동성혼을 한 뒤, 대한항공 가족 마일리지를 등록한 동성 부부로도 알려져 있다. 유연·윤해 커플은 2018년부터 만남을 이어오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보고 이 신년 미사에 참석했다가 축복을 받게 됐다.

이 신부는 이날 신년 미사 직후 구약성경 속 ‘민수기 6장 24~26절’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 기도문을 낭독하며 두 커플을 축복했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이들을 지켜주소서”라고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미국 뉴욕의 제임스 마틴 신부가 동성 커플을 축복할 때 사용한 기도문이다. 이 신부는 “성소수자들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주님의 축복에서 그 어떤 이도 배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연씨는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축복을 통해 다시 주님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어 기쁘다”며 “길을 열어주신 앨라이 신부님들, 수녀님들께 깊은 감사를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크리스씨도 “혼인 예식과 달리, 사목적 축복은 여러번 받을 수 있다”며 “동성 커플들과 사제들이 서로 부담 갖지 않는 선에서 축복을 자주 청하고 줄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형성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르쿠스는 이후에도 축복을 원하는 동성 커플의 신청을 받아 가톨릭 사제와 연결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신부가 동성 커플을 축복할 수 있었던 건,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지난해 12월 ‘간청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의 교리 선언문에서 동성 커플이 원한다면 가톨릭 사제가 이들에 대해 축복을 집전해도 된다고 허용한 데 따른 것이다. 선언문은 비록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이 혼인성사와는 다르다는 단서를 달긴 했으나, 2021년 ‘동성 결합은 이성 간 결혼만을 인정하는 교회의 교리를 훼손하는 것이기에 동성 커플을 축복할 수 없다’는 가톨릭의 기존 방침에서 크게 변화한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 신부의 동성 커플 축복식 집전 소식이 공개된 이날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이렇다 할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교황청이 축복식을 승인한 만큼 이에 어긋난 입장을 내놓진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교황청의 포용적인 분위기 속에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가톨릭 사제의 동성 커플 축복은 비공개된 장소에서 이뤄진 뒤 열흘 이상 지나 공개됐다. 아르쿠스 관계자는 “장소 등이 공개될 경우, 반성소수자 세력의 공격이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보수적인 우리 종교계에선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팽배해 있다. 특히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등 국내 개신교 대형 교단 대부분은 공식적으로 교회법에 동성애자와 동성애 옹호자를 배제하거나 처벌하는 규정을 갖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19년 제2회 인천 퀴어퍼레이드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축복식을 집례한 이동환 목사에 대해 지난해 12월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교리와 장정’(감리회 법) 3조 8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가장 높은 처벌인 ‘출교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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