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어른, 나에게 결혼이란

한겨레 2024. 2. 1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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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한국사회] 허진이ㅣ 자립준비청년

“자립의 끝에는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유튜브 채널 ‘열여덟 어른티브이(TV)’ 영상 속 자립준비청년 규환은 ‘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모습이 과거의 나와 겹쳐 보였다. 나 또한 같은 질문에 비슷한 답변을 한 적이 있다. 보육시설에서 지내던 당시 양육자와 한 진로 상담에서였다. 어렸던 나는 지금보다 앳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 가정을 잘 이루는 것이 꿈이에요.”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로 활동하면서 자립준비청년들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중 많은 자립준비청년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라고 하거나, 가정에 큰 의미를 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똑같은 처지에 똑같은 꿈이라니, 우연은 아닐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의사나 연예인 같은 직업을 꿈이라 할 때, 우리가 ‘결혼’과 ‘가정’을 말하는 것은 아마도 결핍 때문 아닐까.

언젠가 강지나 사회복지사가 쓴 책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화목한 가정을 갖고 싶다는 가난한 청소년들의 소망은 정상가족 프레임 밖에 있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반응이다.’ 가슴 한구석이 뻐근히 아팠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을 정상가족으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친부모가 있어야만 하는 수없이 많은 상황에 부딪혀야 했다. 스스로를 무언가가 ‘빠져 있는’ 아이라고 느꼈던 순간들. “나도 사랑받고, 편안할 수 있는 가정이란 공동체가 있으면 좋겠다.”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이만큼 크고 간절한 소망이 더 있을까.

어린 시절 나는 결혼이 삶을 바꿔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결핍에서 오는 아픔은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볼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마치 어릴 적 읽은 동화책 속 ‘신데렐라와 백마 탄 왕자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꿈을 이루고 나니 그것이 지나친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금은 가정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쓸 정도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가족’ 프레임에서 별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결혼식 준비는 만만치 않았고, 보편적인 가정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살림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갈등을 해결하고 ‘친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극복해야 했다. 육아에서 양가 어르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니 다시 일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넘어야 할 산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환상이 결국은 행복한 현실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는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았지만 하나씩 넘으면서 단단하고 특별한 내 가정을, 우리 가족을 만들어갔다. 이제는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덜컥 겁을 내기보단 함께 해결할 배우자를 생각한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니까.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해줄 문제 앞에서 ‘괜찮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신데렐라나 백마 탄 왕자님은 없지만 우리 가족만의 해피엔딩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돌이켜 보면 자립준비청년이 가정을 이루는 좋은 사례를 평소에 많이 만날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부침을 겪지는 않아도 됐을 것 같다. 결혼 생활에 필요한 마음가짐과 현실적인 결혼 생활을 간접 경험할 수 있었을 테니.

그래서 내가 자립을 앞둔 청년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려 한다. 2021년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하나로 보육시설을 방문해 자립 경험과 정보를 공유했던 ‘자립 강연 프로젝트’에 이어 올해는 다양한 방법으로 연애, 결혼, 육아와 관련한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자립을 앞둔 청년들에게 가정과 인생을 꾸려가는 일이 온통 장밋빛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편안하고 설레는 꿈을 꿀 수 있도록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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