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농구만 알았던 프로 선수, 학교 선생님이 되다!

손동환 2024. 2. 1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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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4년 1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2023년 12월 11일 오전 11시 40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프로는 확실히 냉정한 무대였습니다”
김태주는 여수전자화학고(현 여수 화양고) 시절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평가받았다. 스피드와 패스, 공격력 모두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
최고의 유망주였던 김태주는 고려대학교로 입학했다. 신입생부터 주전 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김태주의 성장세는 더뎠다. 2학년 때 어깨를 다쳤고, 어깨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컸기 때문.
그래서 김태주는 드래프트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10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3순위(전체 13순위)에야 부름을 받았다.
게다가 김태주를 지명한 팀은 서울 삼성. 농구 명가이자 가드 왕국으로 불린 팀이었다. 그런 이유로, 김태주의 프로 인생은 가시밭길일 것 같았다.

2010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3순위로 삼성에 입단했습니다.
사실 2009년에 얼리 엔트리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 사정으로 인해, 드래프트를 나서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후에 어깨를 다쳤고, 1년을 거의 쉬었어요. 경기를 거의 못 뛰어서, 전망이 어두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준호 감독님께서 제 이름을 불러주셨어요. 그때만큼은 모든 게 녹아내렸던 것 같아요.
삼성의 첫 인상은 어떠셨나요?
삼성은 워낙 명문 구단이잖아요. 훈련 시설도 너무 좋고요. 무엇보다 프로에 간 거라, ‘나도 뭔가를 이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선발해준 삼성에 너무 감사하기도 했고요.
이상민(현 전주 KCC 코치)과 이정석(현 용산중 A코치), 이원수(현 이시준, 인천 신한은행 코치) 등 좋은 가드들이 많았습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대학교 때 운동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몸을 만드는 게 먼저였죠. 그리고 훌륭한 선배님들이 많아서, 저는 선배님들의 노하우를 흡수하고 싶었습니다.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보다, 배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이유였을까요? 데뷔 시즌(2010~2011) 7경기 평균 2분 29초 밖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TV에서 봤던 사람들과 훈련하는 것도 신기했고, 벤치에 앉는 것 역시 신기했어요. 그렇지만 벤치에만 있다 보니,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프로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확실히 냉정하더라고요. 서열도 확실히 존재했고요.

“주제 파악을 못했습니다”
선배들의 벽을 경험한 김태주는 군 복무를 선택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다. 그러나 김태주는 제대한 후에도 많이 뛰지 못했다. 김승현과 이정석, 이시준 등 수준급 가드들이 삼성에 있었기 때문. 그런 이유로, 김태주는 또 기다려야 했다.
물론, 기회를 아예 못 받은 건 아니었다. 2013~2014시즌에 44경기 평균 14분 42초를 코트에 있었다. 그렇지만 2014~2015시즌에는 31경기 평균 12분 25초 출전. 기다림에 지친 김태주는 은퇴를 결정했다.

군에 일찍 입대하셨습니다.
김상준 감독님께서 새롭게 부임하셨습니다. 한 달 동안 운동을 같이 했죠. 하지만 구단에서는 선수 계약 시기에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군대를 다녀온 다음에, 상황을 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회복무요원을 시작했습니다.
사회복무요원 기간 중에는 어떤 것들을 준비하셨나요?
첫 1년 동안은 그냥 쉬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께서 고생하시는 게 눈에 보였어요. 저를 어떻게 뒷바라지하셨는지 알 수 있었죠.
또, 구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제가 다행히 산불관리 요원이라, 혼자 산을 뛰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1년 정도 산을 매일 뛰었고, 몸무게를 7~8kg 정도 감량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팀으로 합류했고요.
제대 후에도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잘하는 선배님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에게 힘을 주고, 돈을 버는 게 중요했죠. ‘어떻게든 살아남자. 어떻게든 인정받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대 첫 시즌(2013~2014) 때, 주전 형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팀에서도 “김태주는 수비를 열심히 한다”고 인정해주셨고요. 그런 것들이 겹쳐서, 제가 생각보다 많이 뛸 수 있었습니다. 2014~2015시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지만 2014~2015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2014~2015시즌 종료 후 FA(자유계약) 자격을 얻었습니다. 주변에서 저를 높이 평가해주셨고, 저도 자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경솔했어요. 저를 과대평가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팀과 조율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후회를 엄청 했어요. 주제도 모르고 까불었거든요.(웃음)

“모든 걸 보상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태주도 그랬다. 하지만 다른 은퇴 선수들과는 달랐다. 체육 선생님을 진로로 삼은 김태주는 교원 임용 자격 시험을 준비했다.
공부만 했던 이들도 교원 임용 자격 시험 앞에서 좌절한다. 그만큼 어려운 시험. 농구공만 잡았던 김태주에게는 더 어려웠다. 그렇지만 김태주는 남들에게 없는 것들을 갖고 있었다. 선수 시절부터 쌓은 ‘인내’와 ‘끈기’였다.
‘인내’와 ‘끈기’를 겸비한 김태주는 교원 임용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체육 선생님’이 된 김태주는 현재 모교인 여천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동시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여천중 농구부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다. 모교에서 학생과 선생님을 모두 경험했기에, 김태주의 마음은 남다를 것 같았다.

은퇴 후 교원 임용 자격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FA를 실패했지만, 1년 후에 재도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몸을 만들면서, 그동안 못했던 영어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영어 공부를 하다 보니, ‘나도 공부로 뭔가를 알게 되는구나’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그러다가 2016년 7월에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어떤 걸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전공을 살리기 위해, 교원 임용 자격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다만, 그때는 분위기 확인 차 시험에 응했습니다. 공부 또한 하나도 못했고요.
첫 시험은 어떠셨나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험 절차와 시험 응시 중에 발생하는 긴장감을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의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간절함도 없고 지식도 없다 보니, 긴장이 안 됐거든요. 그래서 2교시 종료 후 조퇴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다음 해 1월 17일부터 인터넷 강의를 받았습니다. 1년 정도 공부에 매진했죠. 그리고 시험장에 갔는데, 손목 시계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시험장에도 시계가 없더라고요. 시간 감각이 전혀 없다 보니, 긴장이 너무 됐습니다.(웃음)
결과는 어땠나요?
1교시(교육학 시험)는 1시간이라 그나마 괜찮았는데, 문제는 2~3교시였습니다. 시험 시간이 1시간 40분이었거든요. 게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했습니다. 결국 1시간 정도 밖에 문제를 풀지 못했습니다.(김태주는 “화장실로 향한 수험생은 시험장에 복귀할 수 없다”고 시험 규정을 이야기했다) 가채점을 해보니, 터무니없이 떨어졌더라고요. 결과를 본 후, 많이 자책했습니다. 준비한 걸 해보지도 못했거든요.
두 번째 시험이 터닝 포인트였을 것 같아요.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시간을 재면서 시험을 연습하는 게 포인트였습니다. 그리고 소변 때문에 시험을 못 봐서, 소변을 흡수할 수 있는 성인용 기저귀를 구매했습니다.(웃음) 실제로, 소변을 봤는데, 흡수가 잘 되더라고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문제만큼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필기 시험도 중요하지만, 2차에 치르는 실기 시험도 중요합니다. 다른 건 다 자신 있었는데, 수영이 너무 부족했어요. 그래서 매일 연습했고, 기록도 점점 단축했습니다. ‘하니까 되는구나’라는 걸 또 한 번 깨달았습니다.
숱한 경우의 수를 대비하니, 긴장이 덜 됐습니다. 결과도 좋았어요. 필기 시험 점수가 커트 라인보다 5점 더 높더라고요. 실기 시험 점수와 면접 점수가 평균이었음에도, 제가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합격 발표 2~3주 전에는 일상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거든요. 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에, 긴장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최종 발표 전날에 아는 형과 술 한 잔했습니다. 그런데 저 스스로 합격 발표를 볼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형. 내가 합격 여부를 볼 자신이 없다. 형한테 수험 번호를 알려줄 테니, 형이 좀 대신 봐줘. 오전 10시에 발표될 거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이 10시 3분에 전화해줬어요. “합격했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야, 제가 직접 확인했는데, 정말 ‘최종 합격’이라고 적혀있었어요. 너무 기뻤습니다. 모든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거든요.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마음도 들었고요.(웃음)
학생들 앞에 처음 선 순간이 생각날 것 같아요.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묘하기도 했고, 말이 안 되기도 했죠. (왜 그랬나요?) ‘내가 학생들을 가르친다고?’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다 보니, 이 일이 너무 즐겁더라고요. ‘교사’라는 직업에 자부심도 느꼈고요.
모교인 여천중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을 보냈던 농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했고요.
2022년부터 여천중학교로 부임했습니다. 많은 게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들이 생각났죠. 다만, 예전에는 학생으로서 땀을 흘렸다면, 이제는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지원해줘야 합니다. 사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농구가 없었다면...”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김태주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농구 인생을 돌아봐달라”고 말이다.
김태주는 어린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코트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모교 후배들을 지켜보고 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농구와 함께 한 김태주는 “농구가 없었다면, 좋은 삶을 살지 못했을 거다”며 ‘농구’를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생각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농구를 하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좋은 삶을 살지도 못했을 거고요. 그래서 농구는 제 인생을 바르게 만들어준 매개체라고 생각합니다.
‘김태주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고등학교 때는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고, 대학교에서는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프로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치를 경험했고요. 최고점과 최저점, 중간 모두 경험했기에, 여러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마다 처한 입장과 위치가 다르고,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늘 겸손하고 늘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네. 농구는 매력적이고 훌륭하니까요. 은퇴했음에도, 농구하는 게 꿈에 자주 나올 정도입니다.(웃음) 그 정도로, 농구는 제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 같아요. 다만, 현역 때 잘못된 연습 방식으로 슬럼프와 마주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게끔, 열심히 하되 효율적인 연습 방법을 찾을 것 같아요. 다시 농구를 한다면요.

일러스트 = 락(본문 첫 번째 사진)
사진 제공 = KBL(본문 2~4번째 사진), 김태주(본문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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