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 넘쳐 누구나 즐겼다…‘소고기 천국’이 오히려 걱정이였던 200년전 조선 [서울지리지]
홍석모(1781∼1857)가 <동국세시기>에서 소개한 음력 10월(이하 음력) 서울풍속 중 하나다. 책이 언급하는 음식은 조선시대 소고기 요리의 최고봉이라는 ‘설하멱적’(雪下覓炙·눈내릴 때 찾게 되는 구이)이다. 음력 10월이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눈이 내릴 때 쯤, 화로 앞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구워먹던 고기가 바로 설하멱적인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조선시대, 소고기는 ‘큰 솥에 물 한가득 붓고 끓여 멀건 국으로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인식되지만, 뜻밖에도 그시절 사람들은 현대인도 귀해서 잘 먹기 힘든 소고기를 숯불에 구워먹었다. 사실, 조선사람들은 소고기 마니아였고 조선은 한해 40만 마리의 소를 도축하는 ‘소고기 왕국’이었다.
박제가(1750~1805)의 <북학의> 역시 “어떤 사람이 돼지 두 마리를 사서 짊어지고 가다가 서로 눌려서 돼지가 죽었다. 하는 수 없이 그 고기를 팔게 되었지만 하루가 다 지나도 돼지고기는 팔리지 않았다. 이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소고기를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 전라도에서는 잔치에 홍어가 빠지면 잔치가 아니라고 한다지만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잔치상에 반드시 소고기가 올라와야 했다. 이덕무(1741~1793)의 <세시잡영歲時雜詠)>은 “(잔치때 잡는 소가) 부자들은 2~3마리(上富層數牛), 중간 부자들은 1마리(中富層一牛)”라고 했다.
임금의 수라에는 소고기가 빠지는 날이 없었지만 폭군 연산군(1476~1506·재위 1494~1506)의 소고기 사랑은 유별났다. <연산군일기> 1506년(연산 12) 3월 14일 기사에 따르면, 연산군은 소고기 먹기를 좋아해 불시에 고기를 올리라 했고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길가는 소를 빼앗아 바쳐 원망하는 자가 길에 가득했다. 연산군은 송아지와 지라, 콩팥 등 특수부위를 즐겼다고 실록은 전한다. 소고기는 전투를 앞둔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술과 함께 지급되기도 했다.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3)의 문집 <부사집>은 “왜적이 성을 포위하여 바야흐로 긴급하지만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공이 밤낮으로 성을 순시하며 소고기와 술을 군사들에게 먹였다”고 했다.
<승정원일기>의 통계는 이를 훨씬 능가한다. <승정원일기> 1775년(영조 51) 3월 24일 기사에는 무분별한 도축의 폐단을 고발하는 인천의 유생 이한운의 상소가 올라와 있다. 여기에 도축규모가 상세히 언급돼 있다. 상소는 “서울에는 24개의 현방이, 지방에는 360개의 고을, 26개의 큰 병영과 여러 작은 병영, 여러 진보(鎭堡·진영과 보루), 여러 우관(郵官·역참의 외관직)이 도축하는 것이 이미 500여 마리를 넘는다. 서울과 지방의 사도(私屠·불법 도축)에 의한 것이 또 500여 마리를 넘으니 이를 합치면 하루에 1000여 마리가 되고 한달이면 3만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또 4명일(설·단오·추석·동지)에 서울과 지방에서 도축하는 것이 2만~3만 마리이니 1년이면 38만~39만 마리가 된다. 해마다 이 수를 도축하니 죽는 소의 숫자는 우역 때보다 더 하다”고 했다.
우역이 발생해 소가 대량폐사되면 도축금령이 강화되고 몇년 뒤에는 소의 수가 다시 증가하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우역이 발생하지 않은 평소의 소값은 대략 20냥 수준이었다. <승정원일기> 1775(영조 51) 3월 24일 기사는 “예전에 소값은 10냥(兩)을 넘지 않았고, 지금은 30량 정도 한다(昔者牛價, 多不過十餘兩, 今者牛價三十餘兩)”고 했다.
이를 쌀값과 비교하면, 개략적으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 <정조실록> 1794년(정조 18) 12월 30일 기사에 따르면, 쌀 한 석(144㎏)당 가격은 4~6냥, 즉 평균 5냥이다. 소 한 마리 가격이 쌀 4석 밖에 안되는 계산이다. 요즘 쌀 한석 가격이 36만원 정도라고 가정할 때 소 한 마리는 144만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지금과 조선시대 쌀값의 절대 비교는 어렵지만 소값이 저렴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사람들이 소고기를 자주,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었던 이유다.
현방은 소고기를 독점 판매하는 조건으로 삼법사(三法司·형조, 한성부, 사헌부)에 수수료, 즉 속전(贖錢·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바쳤다. 삼법사는 현방 수탈에 혈안이었다.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문헌을 종합하면, 한해 징수된 속전은 1704년(숙종 30) 7700냥이었다가 1733년 1만3800냥, 1793년(정조 17) 2만1800냥으로 늘었고 19세기에는 4만7000냥까지 치솟았다.
김유(1491~1555)의 <수운잡방>은 육면과 분탕을 소개한다. 육면은 고기를 가늘게 썰어 밀가루·메밀가루를 입힌 뒤 삶아 국수처럼 먹는 요리이고 분탕은 밀가루를 풀어 끓인 맑은 소고기 장국이다. 이와 함께 조선 요리서에는 서여탕(소고기·마·계란을 육수에 넣고 끓인 탕), 삼하탕(소고기 완자·물만두를 섞은 탕), 황탕(소갈비를 삶은 탕에 생강·잣·개암·노란 밥·갈빗살·고기완자를 넣고 끓인 탕), 양식해(소양을 익혀 밥·누룩·소금과 섞어 발효시킨 음식), 양숙(소양을 푹 삶아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음식), 토장(넙적국수), 소마(튀김만두), 타락(요구르트) 등 수많은 조리법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현재 소고기 요리를 접한다면, “무슨 맛이 이 모양이냐”, “또 쓸데 없이 왜 이렇게 비싸냐” 등의 불평을 늘어놓을게 뻔하다.
<참고문헌>
1. 김동진.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위즈덤하우스. 2018
2. 성균관과 반촌. 서울역사박물관. 2019
3. 강명관. 노비와 쇠고기. 푸른역사. 2023
4.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동국세시기(홍석모), 북학의(박제가), 세시잡영(이덕무), 목민심서(정약용), 어우야담(유몽인), 동국여지비고, 수운잡방(김유), 부사집(김시민), 장계향(음식디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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