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현장 모르는 이를 어찌 리더라 부르리

이남석 발행인 2024. 2. 1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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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3편
실패로 돌아간 ‘왜적 소탕작전’
짧은 시간 진영 꾸린 이순신
공격에 대항하지 않은 왜군
무리한 공격 명령 내린 조정
전장 지키지 않은 군 수뇌부

1594년 10월 조선 조정이 거제도 일대에서 진행한 '왜적 소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지도자들의 결함에 있었다. 총사령관을 맡은 윤두수, 현장 사령관 권율은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는 우愚를 범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을 입에 달기 시작한 정치꾼 중에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몇이나 될까.

현장을 모르는 이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좌의정 윤두수가 선조를 움직이게 한 배경에는 원균이 있었다. 원균은 자신의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바로 사돈관계인 윤두수에게 "장문포를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순신은 이런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장문포 토벌작전 이후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원균이 속임수를 썼다"며 분개하는 모습을 보고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 흉악하고도 고약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순신에게 장문포 공격에 합류하라고 지시가 내려온 것은 1594년 9월 22일이었다. 이날 도착한 도원수 권율의 문서에는 "27일에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켜야 한다"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이때는 이순신이 추수를 앞두고 한산도에 있는 대다수의 병졸들을 고향으로 보낸 직후였다. 이런 터라 격군 등 정예 병력을 5일 만에 다시 불러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급박했지만 이순신을 믿고 따르는 장졸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진영을 꾸릴 수 있었다. 「난중일기」에도 이를 짐작하게 할 만한 대목이 있다. "9월 25일. 첨지 김경로는 군사 70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저녁엔 첨지 박종남이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조봉도 왔다. 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수군과 합세하라는 권율의 명령을 받은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와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 전라병사 선거이 등이 26일부터 이틀에 걸쳐 잇따라 한산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이들을 50여척의 판옥선에 나눠 타게 하고 9월 27일 순차적으로 출항시켰다. 그 후 흉도 안쪽의 바다(칠천량)에 집결시켜 진을 치고 밤을 보낸 후 29일 장문포 앞바다로 진입했다.

적의 동태를 살펴보니 진지에 있는 왜적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나마 포구 쪽에서 적선 2척이 얼쩡거렸다. 바로 격파해 버리니 정박한 배를 지키고 있던 왜적들은 배를 남겨두고 모두 육지로 도망갔다. 아군은 빈 배들을 모두 불태워버린 후 칠천량으로 돌아와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10월 1일 새벽. 이순신은 원균과 이억기를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게 하고 직접 충청수사 등 선봉장들과 함께 영등포(거제시 장목면)로 진입했다. 결과는 뻔했다. 이순신은 이렇게 기록했다. "한 놈도 나와서 대항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며칠이나 계속됐다. 10월 3일에도 장문포 공격을 시도했으나 날이 저물 때까지 적의 대항이 없어 결국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10월 4일엔 곽재우·김덕령 등이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육지에 내려 적을 공격했지만 적들은 대응 없이 내빼기만 했다. 10월 6일에도 선봉부대를 보내 장문포 왜성을 공격했다.

적들은 성채에 몸을 숨긴 채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기만 했다. 아군의 사상자만 늘어났다. 이때 왜적 몇명이 나와서 땅에 패목牌木을 꽂아 세웠다. 패목에는 "일본과 명나라가 강화를 하니 서로 싸움이 불가하다(日本與大明方講和不可相戰)"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순신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날 흉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재정비하고 10월 8일 다시 적의 소굴로 진입했다. 하지만 적들은 여전히 대응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도착한 선조의 '공격 중단' 명령에 따라 이순신은 모든 병력을 이끌고 흉도를 거쳐 자정에야 한산도에 도착했다.

거제도 일대의 대대적인 왜적 소탕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 요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왜적은 이순신과 싸울 의지가 없는데도 조선의 최고 지도자와 군 수뇌부는 무리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게다가 왜적은 강화협상을 진행하면서 명나라와 암묵적으로 휴전상태를 유지해왔다. 이순신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한 손쉬운 핑계가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더 심각한 건 전쟁을 지휘·통제하는 리더들의 '결함'이었다. 총사령관격인 도체찰사 윤두수는 조선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전장과는 멀리 떨어진 순천에 머물고 있었다. 현장에 있어야 할 도원수 권율 역시 전장에서 동떨어진 구례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군과 명군의 강화조약이 진행되면서 양국이 암묵적 휴전상태라는 점은 이미 선조와 군 수뇌부도 알고 있었다. 전력투구는 고사하고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의병들에게만 왜성을 공격하도록 한 셈이다.

장문포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조정에서는 논공행상이 있었다. 말이 논공행상이지 실제로는 당파싸움이었다. 당연히 좌의정 윤두수가 타깃이 됐다. 조정대신들은 "좌의정 윤두수는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우의정 유홍은 거짓말로 나라를 망치게 한다"며 대론(현재의 탄핵)을 일으켰다.

결국 좌의정 자리에는 김응남이, 우의정에는 정탁이 앉았다. 장문포 공격을 반대하며 선조에게 공격명령을 중지해줄 것을 수차례 건의했던 영의정 류성룡은 자리를 보존했다. 이순신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순신도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을 받을 뻔했기 때문이다.

갑오년 11월 초,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자진사퇴하겠다며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를 조정에 보냈다. 작전 실패를 사퇴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때 조정 대신들은 그 배경을 '원균과의 갈등'에서 찾았다. 원균을 비롯한 일부 삿된 무리들의 모함 때문이라는 설도 나돌았다.

거제도로 진격한 이순신은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11월 12일, 선조가 좌의정 김응남에게 이렇게 물었다. "원균과 이순신이 무슨 일로 다투는 것이오?" 그러자 김응남은 "이순신의 공이 그리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윗자리(수군통제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협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고 답했다. 김응남은 또 이순신이 사퇴를 자청한 것은 부당한 일이니, 오히려 원균의 노고를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균을 두둔했다.

마침내 선조는 조정대신과 체직(신하들의 직책과 직급을 바꾸거나 임용하는 일) 논의 끝에 원균을 충청도 병마사로 승진시켰다. 이순신을 시기하며 그를 쳐내려 했던 무리들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싶었으나 당시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견내량을 틀어막고 왜적에게 한 치의 틈을 내어주지 않고 있는 이순신의 역할이 너무 큰 데다 그의 전공 또한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마음속 품고 있는 "이순신 대신에 원균"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고, 이는 훗날 나라를 다시 처참한 꼴로 만들게 한 근본 원인이 됐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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