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묻어나는 브랜드 네임…거란과 캐세이퍼시픽

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2024. 2.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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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부영의 브랜드 & 트렌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포스터. 사진 KBS

언어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 특히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의 영향력만큼 퍼지게 돼 있다. 한국어능력시험(TOPIK) 외국인 지원자 수가 2000년 6000명이 채 안 됐지만, 2019년에는 약 38만 명이 응시했다. 한국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방증이다. 영국과 미국이 차례로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영어는 제일 영향력이 강한 언어가 됐다. 독일어 ‘energy(에네르기)’는 영어 ‘에너지’가 됐고 ‘왁찐(Vakzin)’은 ‘vaccine(백신)’이 됐다. 중남미가 원산지로 포르투갈, 스페인의 정복 전쟁을 통해 세계 각지에 퍼져나간 과일이 있다. 그 과일은 ‘아나나스(ananas)’다. 스페인은 열매 모양이 솔방울을 닮았다고 ‘piña(피냐)’라고 불렀고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에서는 ‘파인애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나나스라고 부르는 나라가 많지만, 대세는 파인애플이다. 영어의 힘이 이렇듯 강하다. 수천 년 동안 티베트에선 이 산을 ‘초모랑마(대지의 여신)’로 불렀다. 중국어 주무랑마(珠穆朗瑪)도 사실은 초모랑마를 음차한 것이다. 이 산을 ’에베레스트’라고 부른 시간은 채 200년이 안 됐다. 1852년 영국이 측량을 통해 이 산이 세계 최고봉임을 확인한 뒤, 전임 측량국장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 에베레스트산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도 에베레스트라고 부른다. 특히 다른 나라의 지명, 나라 이름은 영어로 듣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황부영 브랜다임앤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현 부산 도시 브랜드 총괄디렉터, 현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캐세이퍼시픽 브랜드에 스며든 거란

1990년대 중반 필자는 러시아에서 1년 정도 지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질문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라 이름을 러시아말로 묻기도 했다. ‘Корея(까레야)’, 한국에서 왔냐는 말이다. ‘Япония(이뽀니야)’, 영어 Japan과 비슷하다. 일본에서 왔냐는 말이다. ‘Китáй(키타이)’, 중국 사람이냐는 얘기다. 그때도 궁금했었다. 왜 중국을 키타이라고 러시아에서는 부르는지. 사실 키타이는 거란이란 뜻이다. 최근 TV 드라마로 ‘고려거란전쟁’이 방영될 정도로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얽혀있기도 했던 민족이다. 거란족은 요하(遼河) 상류 지역에서 흩어져 살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947년 나라를 세웠다. 요하 지역을 근거지로 했기에 나라 이름도 요(遼)나라였다. 거란은 한자로 ‘契丹’으로 적는데 우리 식 한자 발음은 ‘글란’이고 원래 발음은 ‘치단’ ‘키탄’으로 추정된다. 거란(kitan)이 한창 세력을 떨칠 때, 러시아나 유럽 쪽까지 전해져 ‘키타이’라는 변형된 이름으로 불렸다. 중국은 영어권에서는 ‘차이나(China)’지만 반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키타이(Kitai)’다. 서양은 중국 하면 진(秦)을 연상했고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는 거란을 통해 중국을 접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거란이 ‘카타이’로 언급된다. ‘키타이’가 영어식으로 바뀐 것이 카타이 그리고 ‘캐세이’다. 홍콩의 항공사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의 캐세이는 거란이란 뜻이다. 캐세이퍼시픽은 1946년 홍콩에서 설립된 항공사다. 창업주는 사명을 고민하다가 중국의 정체성은 잃지 않으면서도 중국(China)이라는 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연상은 약하게 가져가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동방견문록’을 열심히 읽고 있던 창업자가 캐세이(Cathay)라는 단어를 활용한 것이다. 캐세이퍼시픽의 마일리지 프로그램이 ‘마르코 폴로’인 것을 보면 짐작된다. 거란은 사라졌지만, 세계적인 항공사 브랜드로 살아남아 있다.

캐세이퍼시픽 항공기. 사진 캐세이퍼시픽

두문자 합성어, 파키스탄

거란인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으로 추정된다. 북방 민족은 자기들의 땅을 보통 ‘~탄’으로 지칭한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중앙아시아 5개국(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명칭의 유래가 그렇다. ‘~탄’ ‘~스탄’은 땅 혹은 나라를 뜻하는 고대 인도어에서 나온 말이다.

단 파키스탄만은 예외다. 파키스탄은 만들어진 이름이다. 인도 서쪽에 있고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였으나 인도와는 언어와 민족, 문화, 정서도 완전히 달랐기에 일찍이 자치나 독립운동이 활발했었다. 인도와는 특히 종교가 달라 앙숙지간이었는데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별개의 국가로 갈라졌다. 파키스탄은 1930년대 영국에서 유학하던 독립운동가 라흐마트 알리 등이 고안해 낸 이름이다. 인도 서쪽, 무슬림이 다수 거주하는 인더스강 유역 5개 지역 펀자브(Punjab), 아프가니아(Afghania),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글자를 따와 ‘PAKSTAN’을 만들고, 발음의 용이성을 위해 중간에 ‘i’를 추가한 것이다.

파키스탄의 공용어는 우르두어인데 파키스탄이란 말은 우르두어로 하면 ‘파크스(순수하고 깨끗한 사람)가 사는 나라’라는 뜻도 된다고 멋지게 부연 설명을 붙인다. ‘pak’은 우르두어로 ‘신성한’ ‘청정한’이란 뜻인데 뜻이 같은 페르시아어 ‘pāk’에서 따온 차용어다. ‘stan’은 페르시아어로도 땅을 뜻하는 접미사다. 그러니 ‘Pakistan’이라고 하면 ‘정결한 땅’ ‘신성한 나라’ ‘청정한 나라’라는 뜻도 된다. Pakistan이라는 단어가 통째로 페르시아어 단어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라흐마트 알리는 이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나라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셔터스톡

엑스포가 묻어있는 브랜드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낙관, 그 낙관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1851년 런던의 만국박람회다. 오늘날 엑스포의 시작이기도 하다. 박람회 전시장으로 쓰기 위해 영국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건축물을 세계에 선보였다. 규격화된 주철 구조물과 유리만으로 만들어진 대규모 건물이었다. 개최 연도에 맞춰 좌우 1851ft(564m) 길이로 지었으며 석재나 벽돌을 쓰지 않고 유리와 철제 빔만으로 지었다. 정식 명칭은 따로 있었지만, 당시 주간지 칼럼니스트가 붙인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불린다. 수정궁 박람회의 전시물 중 가장 관심받았던 것은 프로이센에서 출품한 크루프(Krupp)의 ‘강철로 만든 거대한 대포’였다.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은 알프레트 크루프는 ‘대포왕’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비스마르크가 열심히 후원한 크루프는 독일 산업의 상징과 같았으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크루프 포에 힘입어 대승했다는 평을 받는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청나라와 일본군이 들어오자 농민군은 정부군과 전주 화약을 맺었다. 농민군이 흩어졌음에도 청과 일본의 군대는 조선을 떠나지 않았고 순식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이 조선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자 해산했던 농민군이 다시 모였으나 서울로 향하던 전봉준 부대를 가로막은 것은 정부군과 일본군이었다. 수만 명의 농민군은 일본군의 독일제 크루프 기관총 앞에 처참히 무너졌다. 크루프는 독일 철강 산업의 상징과도 같았고 제국주의 팽창의 무기이며 세계대전의 숨은 주인공이었다.

엑스포가 낳은 최초의 히트 브랜드 크루프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다. 1999년 크루프는 또 다른 철강 업체인 티센과 합병, ‘티센-크루프(Thyssen-Krupp)’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디서 많이 봤을 것이다. 큰 빌딩의 좀 괜찮은 엘리베이터에서 오늘도 흔히 보이는 회사 이름이다. 몇 년 전 엘리베이터 사업 부문은 독립해서 티센크루프 엘리베이터가 됐고 약자로 ‘TKE’라고 표기되기 시작했다. 오늘 본 엘리베이터 만드는 회사가 약 130년 전 동학군을 겨냥해 발사되던 기관총을 만든 회사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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