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릴 수 없다면 전시하라

리빙센스 2024. 2. 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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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집과 낭만 24

가릴 수 없다면 전시하라

패션이든 인테리어든, 가릴 수 없다면 차라리 드러내는 것을 택하리.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옷을 입을 때도 그렇다. 나는 패션 잡지의 조언을 잘 듣지 않는 편이다. 혹시 나의 지난 경력을 아는 분이라면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살짝 짜증이 나셨을지도 모른다. 맞다. 나는 패션 잡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영화 잡지에서 일하다 건너간 패션 잡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영화 잡지는 '영화를 보는 방법' 같은 것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다. 완곡하게 에둘러 어떤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은지를 권할 뿐이다. 혹은 아주 고고한 방식으로 피해야 할 영화를 이야기할 뿐이다. 패션 잡지는 달랐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았다. 키가 작다면 롱코트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과체중을 넘어설 경우에는 스키니진은 절대 입지 말라고 했다. 내가 패션 잡지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여전히 스키니진이 유행이었다. 나는 정말 옛날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지금의 나는 스키니진이야말로 2000년대와 2010년대 최악의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젠지세대 여러분이 스키니진을 '엄마 청바지'라 부르며 넉넉한 사이즈의 바지를 입는 것은 그 끔찍했던 시대에 대한 일종의 세대적 반성일 것이다.

패션 잡지에서 일하다 보니 뭔가 지켜야 할 룰 같은 것이 가득했다. 체형을 가릴 수 있는 아이템을 소개하는 일도 잦았다. 그런 아이템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생각했다. 체형을 가릴 수 있는 아이템?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 텐데? 날씬해 보이려면 가로 스트라이프 셔츠를 선택하지 말라고? 그깟 스트라이프 패턴으로 가릴 수 있는 체형은 없다. 가로 스트라이프를 입든 세로 스트라이프를 입든 날씬한 사람은 날씬해 보이고 통통한 사람은 통통해 보인다. 이건 딴소린데 그 시절 패셔니스타들에게는 가로 스트라이프 셔츠가 일종의 '잇템'이었다. 가죽 라이더 재킷 안에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당신은 하루에도 여러 명은 마주쳤을 것이다. 나도 가로 스트라이프 셔츠가 있었다. 많았다. 그걸 더는 입지 않기로 결심한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친구 부탁으로 홍대 앞의 유명한 바게트 빵 전문점에 가서 바게트 빵 2개를 사서 에코백에 꽂아 넣고 길을 걷다가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누가 봐도 그건 파리지앵 코스프레였다. 그 내적 민망함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물론 인테리어 잡지 역시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다만 여기에는 패션 잡지보다도 더 큰 한계가 있다. 옷으로 체형의 단점을 가리라고 말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래 봐야 옷 한 벌이다. 가로 스트라이프 셔츠가 당신의 체중을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그건 큰 낭비는 아니다. 생 로랑 스트라이프 셔츠라면 조금 부담스러운 낭비일 수 있지만 당근마켓으로 쉬이 팔 수 있는 시대가 됐으니 큰 문제는 없다. 인테리어 아이템은 다르다. 당신이 작년에 큰맘 먹고 산 바실리 체어가 카피로 넘치는 인스타그램과 카페 잇템이 됐다면? 맞다. 그건 좀 맥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인스타에 #진품 같은 태그를 다는 건 더 민망하다. 그렇다고 그 체어를 쉬이 처분할 수도 없다. 큰맘 먹고 산 페르시안 카펫이나 모로칸 러그가 이젠 좀 유행에 뒤처진 것처럼 느껴진다면? 돌돌 말아서 창고 안에 보관하고 좀 더 미니멀한 카펫을 살 수도 있다만, 그거야 큰 창고를 집에 구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나도 카펫과 러그를 당근마켓으로 팔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지만 성공률은 낮았다. 너무 큰 물건은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이 더 힘들다.

맥시멀리즘은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아주 쓸모가 있는 조류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조류를 더하기로 했다.

바로 '전선 맥시멀리즘'이다.

내가 지난 몇 년간 가장 많은 실패를 거듭한 일은 전선을 감추는 것이었다. 많은 인테리어 잡지와 사이트들은 전선을 감추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집에 굴러다니는 인테리어 잡지들을 한 번 다시 찾아 읽어보시라. 당신 집에는 넘치는데 잡지에 실린 집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을 것이다. 전선이다. 물론 인테리어 잡지에 실린 집 사진은 그 집주인이 평소 해놓고 사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리빙센스>기자들이 당신의 집을 방문하기 전, 당신은 하루 종일 청소와 정리를 해야만 한다. 평소 사는 모습대로 찍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의 루이스폴센 조명과 LP 플레이어와 벤타 가습기를 돌아가게 만드는 전선의 존재를 가리는 것이다. 가리는 것도 한계는 있다. 전선은 집이라는 공간의 동맥이다. 현대의 집은 전선 없이 살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기업 CEO는 집을 새로 지으면서 좀 더 미니멀하고 예쁜 일본 가전제품만 사용하기 위해 집의 콘센트를 100V로 바꾸었다는데, 그건 돈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부릴 수 있는 호사일 따름이다.

한동안은 전선 가리는 방법을 인터넷과 잡지에서 찾아 실행에 옮겼다. 가구로 가리는 방법이 있다. 쿠팡에서 전선줄 묶는 케이블 타이를 사서 메두사 머리처럼 제멋대로 구는 전선을 정리하는 방법도 있다. 꼴보기 싫은 하얀 멀티탭을 이케아에서 구입한 멀티탭 정리함에 넣어 숨기는 방법도 있다. 다 해봤다. 모조리 실패했다. 수많은 전선의 포털에 가까운 멀티탭이라는 건 도대체가 가릴 수가 없는 존재다. 그걸 가리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귀찮은 일인 탓이다. 청소기를 돌리기 위해 멀티탭 정리함에서 멀티탭을 꺼내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실은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를 당신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직관성을 추구하며 살게 되어 있다. 직관적으로 해야 하는 일 사이에 자리 잡은 귀찮은 단계를 없애는 방식으로 우리는 진화해 왔다. 아름다운 집을 유지하기 위해 귀찮은 단계 하나쯤은 더해도 괜찮은 사람도 세상에는 있을 것이다. 나는 아니다. 예쁘게 살기 위해 귀찮음을 감내할 수는 없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인테리어 조류는 확실히 맥시멀리즘이다. 없앨 수 없다면 그냥 인정하라. 가릴 수 없다면 그냥 전시하라. 숨길 수 없다면 그냥 드러내라. 맥시멀리즘은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아주 쓸모가 있는 조류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조류를 더하기로 했다. 바로 '전선 맥시멀리즘'이다. 그런 게 존재하냐고? 모르겠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전선 맥시멀리즘'은 순전히 내가 고안해 낸 용어다.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 고안한 용어다.

가릴 수 없는 전선과 멀티탭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건 예쁜 멀티탭이다. 다행히 지난 몇 년간 많은 인테리어 숍에서 예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예쁜 멀티탭을 팔기 시작했다. 이건 나처럼 전선과 멀티탭을 감추려고 시도하다 실패한 자들이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다는 증거다. 그런 자들이 세상에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들이 그걸로 돈을 벌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를 굴린 뒤 짜잔! 하고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자본주의는 정말로 위대하다. 당장 네이버 쇼핑만 뒤져도 형형색색의 멀티탭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나는 사각형 초록색 멀티탭을 잔뜩 사서 아무런 특징도 없는 사무실용 하얀 멀티탭과 교체했다. 그게 전선을 완전히 가려주는 건 아니다. 대신 이건 일종의 '위장법'이다. 스트라이프 셔츠보다 더 효과가 좋은 인테리어 카무 플라주다.

내가 가장 아끼는 멀티탭은 베를린에서 구입한 목제 멀티탭이다. 베를린에서 가장 힙한 패션 디자인 크루 블레스Bless의 숍에 갔다가 발견한 이 멀티탭은 가격도 생각보다 높고 한국까지 운반하기도 지나치게 덩치와 무게가 컸다. 하지만 인테리어 잡지를 즐겨 읽는 여러분은 잘 알고 있다. 예쁘다면 가격과 무게는 상관없다. 당신은 어떻게든 그 물건을 한국으로 가져와야만 직성이 풀릴 것이다. 나는 그놈의 목제 멀티탭을 서울까지 가져오느라 여러 번의 공항 검색대에서 "이건 폭탄이 아니라 멀티탭이라고요"라는 말로 공항 직원들을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놈의 멀티탭은 검색대 엑스레이를 통과하는 순간 누가 봐도 폭탄처럼 보였다. 그놈의 폭탄은 지금 내 거실에서 아름다운 조명과 가습기와 공기 청정기를 열심히 돌리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 아름답게.

김도훈@closer21

오랫동안 ‹씨네21›에서 영화기자로 일했고, <GEEK>의 패션 디렉터와 <허핑턴포스트> 편집장을 거쳐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라는 책을 썼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물건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이 공존하는 그의 아파트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김도훈 나라다.

CREDIT INFO

editor심효진

words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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