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K-무비 허술한 세계관이 부른 참패

조재휘 영화평론가 2024. 2. 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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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2부'(2024·사진)에는 전편에서 산만하게 뻗어나간 서사의 줄기를 수습해 하나의 접점으로 응집하는 편집과 구성의 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펼쳐내는 세계에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무언가 흥미로운 장르의 순간이 파편으로 던져지고는 있지만, 그것이 모인 결과는 감정을 움직이고 이 영화만의 고유한 인상을 각인시키는 지점에는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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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2부’(2024·사진)에는 전편에서 산만하게 뻗어나간 서사의 줄기를 수습해 하나의 접점으로 응집하는 편집과 구성의 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펼쳐내는 세계에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무언가 흥미로운 장르의 순간이 파편으로 던져지고는 있지만, 그것이 모인 결과는 감정을 움직이고 이 영화만의 고유한 인상을 각인시키는 지점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은 SF 장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모지라는 식의 일반론을 답습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언어들은 편견을 재확인하며 실패를 조롱하는 비아냥거림 이상이 되지 못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망가진 한국 상업영화의 각본 상당수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는 ‘예비서사’(exposition) 부분이 극도로 빈곤하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허구의 사건과 인물을 다루지만 적어도 극장에 있는 동안에는 실제 있었던 사건인 것처럼 관객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작중의 인간관계와 역할, 통용되는 규칙과 원리를 보는 이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사전 설명의 작업들이다. 과도한 설명은 전개의 속도감을 해칠 우려가 있지만, 적절한 선에서 함축적으로 제시되는 예비서사는 이후 벌어질 사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중요한 포석으로 작용한다.

‘타짜’(2006)와 ‘도둑들’(2012)에서 보았듯 최동훈 감독은 경쾌한 리듬감으로 능청스럽게 강탈영화의 작전에 요구되는 세팅을 깔아놓는 능숙한 창작자이다. 그러나 ‘외계+인’에 이르면 현실의 무대에 기대어 간결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작업이 수반돼야 한다. 분명 감독의 노림수는 동양적 판타지로서의 도술이 서구적 상상력과 결합하는 혼성장르의 키치적 쾌감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현현하는 황당한 가상의 이미지에 빠져들려면,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1978)이나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처럼 그에 실재감을 부여할 서사의 설득력과 세세한 환경의 설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도리어 더욱 치밀한 현실성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역설. 정확히 이 지점 ’세계관의 구축’(world-building)에서 ‘외계+인’은 실패하고 만다. 왜 반드시 인간의 몸에 죄수를 가두어야만 하는지, 촉수와 신검의 작동원리는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악역으로서 설계자가 지구 환경을 바꾸려는 목적과 욕망은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고, 이안의 성장과정에 있었을 가드와 썬더의 역할, 무륵과 이안의 관계가 깊어질 계기 등, 과정이 누락돼 있으니 감정은 급발진하고 서사의 핍진성은 무너진다. 세계관은 허술하고, 드라마의 퍼즐이 군데군데 빠진 결과 짚이는 건, 기의(記意)를 잃은 채 표류하는 익숙한 기표(記標)들의 공허한 불꽃놀이일 뿐이다.


그러나 ‘외계+인’은 단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승리호’(2021) ‘정이’(2023) 그리고 ‘황야’(2024)에 이르기까지, 역사현실을 떠나 가공의 세계를 무대로 삼은 한국영화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지점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무너져왔다. 장르에 대한 몰이해와 감각의 결여는 겉멋 부리기에만 골몰하는 열화된 복제만을 낳아왔다. 성의 없는 디테일에 독창성 없이 ‘우라까이’로 점철된 결과물을 우리는 언제까지 ‘K-콘텐츠’의 미명하에 용인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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