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아이돌, 세계관의 종말

2024. 2. 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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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대 보이그룹 이끈 설정·콘셉트
이젠 독자 음악장르 ‘OO팝’으로 승부수
복잡다단한 스토리 대신 음악 전면에
대중과 접점 확대 위한 새로운 전략
어떤 세계관이나 스토리 대신 ‘이모셔널 팝’이라는 생소한 명칭의 장르를 전면에 내세운 SM의 신인 보이그룹 ‘라이즈’ [SM엔터테인먼트 제공]

태양계 외행성 ‘엑소 플래닛’에서 온 초능력자 엑소, 소년들의 성장 서사를 담은 방탄소년단(BTS), 내 안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에이티즈....

한 때는 ‘대세’였던 세계관은 깨졌다. 자아의 발견과 성장을 위해 모험과 여정을 마다 않던 소년소녀들은 이제 현실에 발을 붙였다. 사라진 세계관의 자리에 들어온 것은 생소한 ‘음악 장르’다. ‘이모셔널 팝’, ‘보이후드팝’, ‘믹스팝’.... 복잡다단한 스토리 대신 음악을 전면에 내세웠다. 지금은 바야흐로 ‘OO팝’의 시대다.

대중음악계 전문가는 “K-팝의 필수 요소이자 콘셉트의 하나로 여겨졌던 세계관이 점차 음악 장르로 대체되고 있다”며 최근 트렌드를 분석한다.

그간 ‘세계관’은 K-팝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었다. 세계관은 그룹이나 아티스트가 지닌 하나의 설정이자 콘셉트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K-팝 그룹에 스토리를 덧대 독창성을 강화하고, 팬덤을 구축하는 장치로 쓰였다. K-팝 세계관의 시초 격은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인 엑소. 기억도 초능력도 잃은 채 엑소플래닛에서 지구에 오게 된 새로운 스타들이 가요계를 평정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세계관은 팬덤을 쉽게 모으기 위한 방편이자 상업적 수단”으로 “대중에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한 보이그룹들이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팬에게 캐릭터성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걸그룹에 비해 확장성이 떨어지는 보이그룹 위주로 팬덤을 모으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세계관’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K-팝을 지배했던 ‘세계관’ 시스템은 지난해부터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관 콘셉트를 처음으로 시도한 SM이 가장 먼저 탈피, 새로운 ‘콘셉트 장치’를 찾았다. 바로 ‘장르의 브랜드화’다.

SM이 지난해 데뷔시킨 신인 보이그룹 라이즈(RIIZE)에는 어떤 세계관이나 스토리가 없다. 대신 ‘이모셔널 팝’이라는 생소한 명칭의 장르를 전면에 내세웠다. 데뷔곡 ‘겟 어 기타’(Get A Guitar)를 시작으로 ‘토크 색시’(Talk Saxy), ‘러브 원원나인’(Love 119) 등을 내놓으며 착실한 성장 가도를 밟아가고 있다.

라이즈가 데뷔 당시부터 강조한 ‘이모셔널 팝’은 라이즈만의 독자적인 장르다. 라이즈를 담당하는 김형국 SM 위저드 프로덕션 총괄 디렉터는 “멤버가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음악에 담아보고자 한 것이 ‘이모셔널 팝’ 장르”라고 말했다.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만든 세계관에 얽매인 음악에서 벗어나니 보이그룹의 노래는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 라이즈는 이들의 성장과 따라오는 다양한 변화를 음악에 담아낼 수 있게 됐기에 소화하는 음악 장르의 폭도 넓어졌다. 올초 발표한 ‘러브 원원나인’은 밴드 이지이지(izi)의 히트곡 ‘응급실’을 샘플링해 국내 최대 음악 플랫폼 멜론 ‘톱100’ 5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세븐틴 동생 그룹’으로 불리며 데뷔한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그룹 투어스(TWS)는 ‘보이후드 팝’ 음악을 추구한다. 이 역시 투어스만의 ‘독자 장르’로, 1990년대 인기를 얻은 만화가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에 모티프를 뒀다. 보이후드 팝은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음악이라는 게 소속사 측의 설명이다.

플레디스 관계자는 “음표 하나하나, 가사 한마디 한마디에 소년 시절의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포착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성을 담았다”고 말했다.

데뷔 앨범 ‘스파클링 블루’(Sparkling Blue)의 타이틀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는 일단 제목부터 소년 시절의 감성이 물씬 묻어난다. 대중과의 첫 만남을 앞뒀던 투어스의 현재 마음을 대변하는 곡이라는 것이 소속사 측의 설명이다.

사실 ‘OO팝’의 시대를 처음 연 건 걸그룹 트와이스였다. 2015년 데뷔 당시 트와이스는 ‘컬러 팝’이라는 독자 장르를 내세웠다. 힙합, 트로피컬 하우스 등 다양한 장르를 믹스한 형태로 ‘여러 색깔을 담은 음악 장르’로 정의할 수 있다. 음악적 특성은 물론 새로운 네이밍에 있어서도 앞서간 셈이다. 다만 3세대 월드 K-팝 스타 ‘방블트’(방탄소년단, 블랙핑크, 트와이스)의 한 축인 트와이스를 ‘컬러팝’ 그룹으로 기억하는 대중은 없다.

이후 JYP가 내세운 OO팝은 엔믹스(NMIXX)의 믹스팝(MIXX POP)이다. 트와이스에서 시동을 건 후 엔믹스에서 강화한 셈이다. 믹스팝은 ‘두 가지 이상의 장르를 한 곡에 녹여 다양한 맛을 느끼게 한다’는 콘셉트다.

믹스팝의 장르적 특성은 명확하다. 전혀 다른 노래처럼 들리는 두 개 이상의 멜로디를 한 곡에 차용, 극적인 변주를 줬다. 이에 비해 라이즈의 이모셔널 팝이나 투어스의 보이후드 팝은 ‘정서’를 관통하나,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장르적 특성’은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세계관을 담아내기 위한 강렬한 콘셉트의 곡이 아니라, ‘공감 가능한’ 듣기 편한 노래들을 모았다는 점이다. 숏폼 시대에 나타난 중요한 변화와 전략이기도 하다.

한 대형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그동안 보이그룹이 코어 팬덤으로 성장을 이뤘으나 K-팝이 세계 무대에서 확장하고 틱톡 등 숏폼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대중적 확산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며 “특정 연령, 성별, 인종을 넘어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가는 전략이 이지 리스닝 계열로 브랜드화한 것이 장르팝”이라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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