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18m파격적 거대불상...민중의 염원을 담았다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2024. 2. 8.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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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충남 논산 관촉사·부여 대조사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열세 번째 방문지는 충청남도 논산 관촉사와, 부여의 대조사입니다. 〈편집자 주〉
관촉사에 있는 은진미륵. 높이 18m의 거대한 석상이다.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 협객으로 알려진 도적 두목이었다. 소설과 드라마, 만화 등 각종 작품으로 여러 번 다뤄져 잘 알려진 인물이다. 숙종 시기는 장희빈, 인현왕후, 최숙빈 등 익숙한 인물들의 궁중 암투와 남인과 서인의 당파싸움, 그리고 관념적인 사상 논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냉해, 가뭄, 홍수, 전염병 등으로 백성의 삶은 피폐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지배층에게 민생은 안중에 없었기에 도적 집단이 협객의 이름으로 민중들의 환호를 받았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승려 여환이 미륵을 자처하고 무당 용녀와 결합하여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이 온다는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백성을 규합하고 민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세상이 어지러우면 미륵신앙이 득세한다. 지배층이 극도로 타락하거나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달하는 시기엔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염원 때문에 구원자의 등장을 희망하는 미륵신앙이 주목받기 마련이다. ‘관심법’으로 알려진 궁예도 혼란했던 신라 말기에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며 후고구려(태봉)를 세우고 신정(神政)정치를 펼쳤다. 일제강점기에는 미륵세계의 새 세상이 열릴 것을 주장한 증산도의 신도가 600만명에 달했고, 가까이 IMF 외환위기 때엔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사이비 종교나 휴거(携擧) 같은 종말론이 활개쳤다. 미륵신앙을 많이 활용했던 백제의 마지막 영웅이자 비참한 말년을 보낸 견훤의 고장 충청남도 논산에는 우리나라 최대 미륵불이 있다고 하여 최근 방문했다.

미륵불과 미륵신앙

미륵신앙은 6세기 무렵 백제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백제 성왕(552년) 때 부여에 ‘미륵불광사’(지금은 대조사로 알려지기도 함)가 창건되었고, 무왕(634년) 때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창건설화로 알려진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현재는 터만 있음)가 익산에 창건됐다. 백제의 미륵신앙은 신라에 전파되어 화랑의 모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일본까지 전파되거나 토속신앙과 결합돼 여러 설화를 낳기도 했다. 뚱뚱한 몸매와 볼록 나온 배로 큰 포대를 메고 껄껄 웃는 모습의 포대화상(중국 당나라 말기의 불승, 미륵보살의 현신으로 여겨짐)은 중국에서 미륵의 화신으로 전해져 우리에게도 친근하다.

포대화상의 전형적인 모습 [123rf]

통일신라시대 왕실은 백제 유민의 미륵신앙을 흡수했다. 백제 출신 진표율사를 통해 미륵불이 출현하여 설법할 세 곳을 지정해 대규모 사찰을 짓는 국가사업을 벌였다. 김제 모악산 금산사,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 등 사찰을 창건하고 대규모의 전각과 조형물을 세워 미륵 기도 도량으로 삼았다. 왕실이나 지배층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거나 백성들을 통합하는데 미륵신앙을 활용했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문화가 이어져 야외 석조 미륵불상이 유행했는데 우리나라 최대 미륵불인 관촉사 은진미륵이나 부여 대조사 미륵불 등이 이때 만들어진 듯하다.

고려 후기로 내려가면서 미륵신앙이 백성들 삶에 뿌리내렸다.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처럼 민간 신앙과 결합해 장승이나 선돌을 미륵불로 여기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마을 미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충주 문경세재의 미륵리와 미륵사지 그리고 변산 월명암, 통영 용화사, 의성 주월사, 나주 미륵사, 의정부 미륵암, 파주 용암사 등도 미륵불을 모신 미륵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관촉사 은진미륵과 대조사 미륵불

논산에 있는 관촉사는 우리나라 최대의 18m 높이의 미륵불이 있는 절로 잘 알려진 곳이다. 마을 이름을 딴 ‘은진미륵’은 고려시대 세워진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실제 암반을 그대로 깎아서 허리 아랫부분까지 만들고 상체와 머리 부분은 하나의 돌을 조각해 연결한 듯하다. 중간 부위를 연결한 듯한 흔적이 선명하다. 큼지막한 돌덩이를 어떻게 올렸을까?

은진미륵과 제작 시기도 비슷하고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아 있는 석조미륵불이 인근 부여 대조사에 있다. 크기가 10m로 거대한 천연바위 하나를 깎아 머리와 몸매를 새겨 만들었으며 몸체는 뭉툭하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넓적하고 커서 5등신에 가까운 변형된 신체 비율을 하고 있다. 은진미륵을 만든 사람이 시험 삼아 만든 석불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대조사의 석조미륵불. 역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대조사 석불은 보물 217호, 관촉사 은진미륵은 보물 21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은진미륵은 국보로 승격됐다. 투박한 은진미륵의 발가락은 친근감을 주지만 인공미가 느껴지고, 대조사 석불은 자연미가 물씬 풍겨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 두 미륵불은 신라시대의 근엄하거나 너그러운 느낌을 주는 힘 있는 불상들과 비교해보면 기이하고 파격적인 모습의 부처상이다. 고려 후기에 장승 이미지의 민간신앙 등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마을 미륵불 모습이 더 어울릴 법하다.

이에 대해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고려시대에 백제 고토(古土)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숨 막힐 듯 완벽하게 짜인 질서가 아니라 차라리 그 질서를 파괴하는 힘, 괴력과 신통력의 소유자인 부처님이어야 뭔가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하면서 “민간신앙적 특이한 불상은 토속신앙에만 젖어 있던 민중들을 불교에 자연스레 결합시키고 끌어들이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조사 전경

대조사는 부여군 성흥산 자락, 마을로부터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조그만 절이다. 찾는 이가 별로 없어 한적하다. 6세기 초 백제 불교의 중흥에 큰 역할을 했던 겸익스님이 바위 아래에서 수도하는데 큰 새 한 마리가 황금빛을 뿜어내며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큰 새 대신 관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석불을 조성하고 절을 지어 대조사(大鳥寺)로 불렸다 한다.

대조사 석불 바로 옆에는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난 아름다운 노송 한 그루가 있다. 마치 석불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 보호하는 것만 같다. 용화보전(미륵전) 통창을 통해 미륵불과 한 몸이 된 노송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다. 부여 대조사와 논산의 관촉사는 차량으로 40여 분 거리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다.

석불 바로 옆에는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난 아름다운 노송 한 그루가 있다. 마치 석불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 보호하는 것만 같다.
논산 8경 관촉사

산속의 사찰이 풍기는 운치 같은 것은 기대하기 힘든 낮은 야산 초입이지만 불교에서 지혜를 뜻하는 ‘반야’ 산(96m) 자락 오래된 절이라 그런지 입구 분위기는 연륜이 느껴지고 예사롭지 않다. 관촉사는 마을과 맞닿아 있고 큰 길과 연결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고 논산 최고의 절경 중 한 곳(1경)이어서 찾는 이들도 많다.

관촉사 경내 전경과 은진미륵

고려 초기인 968년 승려 혜명(慧明)이 왕명을 받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에 100여명의 인부들과 공사를 시작 삼십칠년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은진미륵’에 얽힌 창건설화도 전해진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으나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길조’ 라며 바위로 불상을 조성할 것을 금강산에 있던 혜명대사에게 맡겼다.

혜명은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있는데, 길거리에서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는 모습을 보고 혜명은 같은 방식으로 거대한 불상을 세웠다.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라고 하며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주었고 상서로운 기운이 21일 동안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고 한다.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따라 찾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빛이 마치 촛불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로 정했다.

은진미륵 앞에는 석등과 오층석탑이 있다. 석등은 화엄사 석등 다음으로 큰 것이라 한다.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상서로운 기운이 허공에 서리며, 국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진다.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다. 일주문과 사천왕문, 그리고 계단을 따라 누각을 지나 대웅전 앞마당으로 가는 길인데 누각 옆에는 해탈문이라 새겨진 돌문이 있다.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하는데, 조선시대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과 잘 어울리게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널찍한 판석을 올려놓아 입구가 좁지만 꾸미지 않은 수수함이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관촉사 경내로 통하는 석문

또 다른 길은 공양간(?) 마당에 주차하고 곧바로 올라가면 3m 크기의 귀를 가진 18m 은진미륵과 미륵전, 그 앞마당에 보물로 지정된 큰 석등과 오층석탑을 마주할 수 있다. 석등은 화엄사 석등 다음으로 크다고 하며 오층석탑 아래 바닥에는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곳에 놓는 배례석이 있다. 연꽃 세 송이가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는 길이가 204㎝ 너비 103㎝, 높이 40㎝의 커다란 규모의 직사각형 연화무늬 받침돌이다. 석등과 오층석탑은 현재 보강공사 중이어서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미륵전에 앉으면 낮게 뚫린 네모난 창틀 사이로 미륵불이 보인다. 마치 액자 속 그림을 보는 듯하다.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뭔가 복을 줄 것 같은 얼굴이다. 2층 형식의 웅장한 대웅전의 앞마당 누각과 석문 사이에는 윤장대가 있다.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인데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이라고 하여 두 번 돌려봤다. 삼성각 앞에선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미륵불과 마을 앞 논산 평야가 그림처럼 어울려 들어온다.

관촉사 2층 누각

‘수많은 불상 중에서 민중적 소망을 남김없이 받아줄 만반의 태세를 갖춘 보살상’이라고 칭송받는 은진미륵은 민간신앙과 결합한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대에는 지배층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을 통합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륵신앙을 활용했던 것이다.

계백과 견훤 등 백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논산의 8경 중 3곳이 사찰이다. 관촉사를 비롯해 아름다운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된 쌍계사(5경), 왕건이 후백제 정벌 후 창건했다는 개태사(6경)들이다. 600m를 자랑하는 동양 최대의 호수 다리인 탑정호 출렁다리(2경)와 황산벌 전투 계백장군 유적지(4경)도 절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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