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테러’ 본질은 정치가 아니다…온라인 혐오와 정신건강의 위기 [정지혜의 빨간약]

정지혜 2024. 2. 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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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로 위장해서 인셀계에 몸담았던 경험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취약하거나 고통에 빠진 남성들의 게시글을 보는 일이었다. 대부분 호르몬이 야기한 십 대 특유의 불안이라는 전형적인 격류에 휘말린 어린 소년들로, 그들은 그 속을 헤쳐나갈 조언을 찾다가 어쩌면 외부의 영향에 가장 취약한 바로 그 순간, 사이비 과학과 엉터리 통계로 치장한, 대단히 비틀리고 여성혐오적인 관점과 비극적으로 조우한다. 그 모습을 나는 숱하게 목격했다.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p.88) 중
 
영국의 작가 로라 베이츠는 저서 『인셀 테러』(성원 옮김, 위즈덤하우스)에서 온라인 여성혐오가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는지, 그 기반이 되는 매노스피어(Manosphere·남성계 커뮤니티)의 생태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조목조목 탐색한다. 이 책은 ‘인셀’을 두 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Involuntarily Celibate의 줄임말로, 비자발적 순결·독신주의자를 뜻하는 영미권 신조어이고, 다른 하나는 온라인 하위문화에서 연애 또는 성적 파트너를 원하지만 구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사람들이다.
방대한 분량으로 소개되는 끔찍한 국제적 사례의 향연은 한국에서도 경각심을 일으키기 시작한 남초 커뮤니티의 일탈 및 폭력성이 실은 전 지구적인 ‘남성 문제’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외롭고 안쓰러운 남성으로 보려 하고, 사안의 심각성은 축소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수면 아래에서 상황이 빠르게 악화됐다는 베이츠의 지적은 통렬하다.

지난해 말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여러 번 무릎을 쳤다. 특히 저자의 핵심 질문 중 하나인 ‘평범한 소년들이 매노스피어를 접하며 어떻게 여성혐오자가 되는지’에 대한 분석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두에 인용한 문단은 그 요약이다.

베이츠에 따르면 여러 모로 아직 설익은 젊은 남성의 취약성을 파고드는 이 커뮤니티는 여성혐오적 관점을 표준으로 탑재한 대안세계를 이상향으로 제시하며 매력적인 오답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남성 인권 향상을 위해 ‘페미니즘 타도’를 외치는 강렬한 정서가 부여하는 소속감은 불안한 영혼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거나 진짜 부당함에 저항하지 않은 채 모든 원망을 여성들에게 쏟아붓는 것으로 살아갈 동력을 준다.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이 지난 2일 서울 송파구 송파책박물관에서 열린 '2024 설날맞이 희망콘서트'에서 인사말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강남구 신사동 한 건물에서 중학생으로부터 공격당해 입원 치료를 받은 배 의원은 이날 피습 이후 첫 공개 활동에 나섰다. 연합뉴스
책을 덮은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이 10대 남자 중학생에게 피습을 당했다. 연초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흉기로 공격을 당한 뒤 약 3주 만의 일이라 이 사건은 ‘정치 테러’, ‘극단적 정치 혐오’ 등으로 묶여 분석됐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분명 그 이상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건의 진짜 키워드는 ‘정치’보다는 ‘혐오’와 ‘온라인’인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온라인 세상에서 더욱 범람하게 된 혐오가 본질이고, 이걸 오프라인에서 실행하는 데에 정치가 가장 좋은 핑계와 수단이 됐다는 얘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4일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을 찾아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한 가운데 문 전 대통령이 이 대표의 피습 부위를 가리키며 위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공
이 대표 습격범인 60대 남성 김모씨의 경우 극단적 정치 성향으로 반 년 넘게 이 대표를 따라다니며 범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 같은 이들이 ‘정치 과몰입’을 하게 되는 배경을 본다면 초점은 정치 그 자체가 아니다.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 공간에 펼쳐진 혐오를 각 정치 진영이 필요에 의해 키우고 이용해먹는 과정에서 김씨 같은 이들이 양성된다고 봐야 한다. 

◆‘남초 커뮤니티의 온라인 여성혐오’가 현실로 나오기까지 

배 의원 피습 사건에서 이 점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 사건을 ‘여야 갈등에 기인한 정치 테러’로 정의하는 데 이견이 있다고 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배 의원이 온라인 공간에서 이른바 ‘희생양‘이었을 수도 있다”며 “15세 A군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터넷 게시판 문제인가, 더 나아가 혐오주의 문제인가 따져볼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10대 남성의 여성 정치인 습격에 《인셀 테러》가 떠오른 것은 단순히 이 범행 자체의 여성혐오성이나 남초 커뮤니티와의 연관성 때문이 아니다. (물론 이를 부정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보다는 온라인 공간에서 주류 혐오 담론을 끌고가는 남초 커뮤니티, 한국 매노스피어의 작동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줘서다. 남초 커뮤니티에 비해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여초 커뮤니티는 규모나 파급력 면에서 그런 공격을 주도하기 힘들뿐 아니라 온라인에서 여성을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받아내고 방어하기에도 벅차다.

지난해 온 국민을 경악케 한 ‘온라인 살인예고’(2023년 7월말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 이후 약 한 달간 469건 발생) 때 이미 위험 수위를 넘나들던 온라인 상 혐오는 스멀스멀 오프라인으로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혐오 판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양대산맥이 ‘정치’와 ‘여성’으로, 극단적 정치 사상과 여성혐오다. 지난 한 달 새 벌어진 두 건의 정치인 테러에서 전자에 의해 공격당한 것이 이 대표이고, 둘 다 결합된 이중의 원망을 받은 것이 배 의원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남초 커뮤니티에서 배 의원은 정치인 가운데 가장 많은 공격을 받는 이 중 하나다. 반페미니즘 정서에 기반한 ‘이대남’이라는 정치적 세력의 선봉에 선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 각을 세운 뒤 배 의원을 향한 이런 적대감은 매우 두드러졌다. 단순 욕설부터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등의 폭력적 발언이 난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팽배한 분위기 속 저질러진 습격을 온라인 여성혐오 정서와 무관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도, 배 의원 습격도 그저 정신적 문제가 있는 남성이 무차별적으로 범행하려다 ‘하필’ 여성이 당했을뿐이라는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되지만 영 설득력이 떨어진다. 야당 대표 다음으로 피습당한 것이 왜 하필 배 의원인지 따져볼 때, 그냥 숱한 정치인 중 랜덤하게 당한 것과 젊은 여성 정치인(남초 커뮤니티에서 대차게 까여 오던)이라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까. 다른 모든 가능성 얘기는 하면서 ‘젊은 여성’이라는 정체성만 빼놓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기이한 전개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건에서 성별 영향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 이수정 교수는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여러 사람 가운데 왜 하필 배 의원을 노렸는지 등에 주목해야 한다”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배현진이라는 이름이 계속 (부정적으로) 언급되면서 급기야 A군이 배 의원을 목표 대상으로 삼게 됐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오프라인 치안 수준을 높이자는 얘기보다 사이버 공간에서 정치인 혐오가 어떻게 퍼지는지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유사 범죄 예방에 더 도움이 될 거란 분석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우리를 위협하는 진짜 ‘정신건강 위기’ 집합소 

습격범 A군의 경우 일명 조울증으로 알려진 ‘양극성 장애’ 소견을 받은 바 있고, 또래 여학생 스토킹 사실 및 교내 불화가 있었다는 주변인 증언이 모아지기도 했다. 남초 커뮤니티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며, 경복궁 낙서범과 배우 유아인이 각각 경찰 조사를 받으러 출석하는 곳에 찾아와 이들을 공격한 인물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렇게 수위가 높아지던 공격이 결국 배 의원 사건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분야를 막론하고 이슈의 한복판에 있는 인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타오른 논쟁의 주인공들을 향해 공격성이 발현된 것이지 특정 정치 신념이 강해서 나타난 행동 같지는 않다.

A군이 사건 현장에서 했다는 “(배 의원이) 정치 이상하게 하잖아요”, 그의 부모가 얘기한 “아이가 정치에 관심이 많다” 등의 말은 ‘온라인 활동을 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 상당수가 정치 관련’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A군이 이 대표 피습에 영향을 받아 모방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제기하는 상황이다. 해당 사건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뜨겁게 주목받으면서 범행이 알게 모르게 부추겨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키우는 이런 혐오와 적대감은 가상 공간을 부유하다가 A군 같은 이를 통해 오프라인 현실로 튀어나온다. 정신질환이 있는 것으로 추정돼 자·타해할 위험이 있는 이를 대상으로 하는 ‘정신응급 합동대응’으로 이런 범행을 막을 수 있을까. A군은 배 의원 머리를 돌덩이로 17차례 가격한 뒤에야 응급입원 조치됐다.

어느 모로 보나 더 효과적인 방책은 정신질환자를 강제 입원시키는 것이 아닌 ‘온라인 혐오 양성소’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다. 베이츠가 《인셀 테러》에서 까발리듯 이런 온라인 커뮤니티는 “취약한 상태에 있는 불행한 남자들이, 최대한 많은 파괴를 자행하겠다고 벼르는 남자들과 긴밀하게 뒤섞이는“ 온상으로서 이곳에 종속된 이들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고 사회성을 좀먹게 만든다.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비하면 ‘온라인 살인예고’는 귀여운 수준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조현병 환자보다 온라인 커뮤니티 세계관에 잠식된 이들의 정신건강이 더 염려돼야 마땅한 것 아닐까. 베이츠 역시 이를 꼬집는다.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어찌어찌 이 여성혐오의 늪에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 온라인 혐오에서 짜릿한 즐거움을 얻는 다른 남자들의 독설과 조롱, 자해 선동에 여과 없이 노출되는 모습”에서 남초 커뮤니티 내부의 모순이 분명하게 느껴진다면서 말이다.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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