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시렁] 당신도 '립밤 목걸이 클럽' 회원이 될 수 있다

윤성중 2024. 2. 6.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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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밤 목걸이 만들기

이번 달에도 산에 못 갔다. 부상(갈비뼈 골절) 때문이다. 폭설이 내렸던 얼마 전, 엉덩이가 들썩여서 준범 선배(회사 선배)한테 말했다.

"선배, 다음 주에 지인이 황병산으로 스키 타러 가자고 그러는데, 갔다 와도 될까요?"

준범 선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야, 안 돼! 이번 달까지만 쉬어! 산에 갔다가 더 다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나는 꼬리를 내렸다. 이후 각별히 조심했다. 누가 달리기를 하자고 해도 나가지 않았다. 사무실에 꼼짝없이 앉아 제안서를 썼고, 집에선 넷플릭스만 봤다.

'이번 등산시렁 뭐 쓰지?'

고민을 꽤 했다. 여러 사람에게 가까운 산에 낚싯대를 들고 가서 낚시를 하자고 했지만 이것이 대체 무슨 콘셉트인지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내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마감 막바지에 이르자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목에 걸고 있는 립밤 뚜껑을 열고 입술에 발랐다. 순간 립밤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써!'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는 평상시 목에 립밤을 걸고 다닌다. 얇은 등산용 코드 슬링에 립밤을 매달았다. 이 목걸이를 본 사람들은 대체로 놀라거나 신기해했다.

"어머! 립밤을 목에 걸고 다니네요?"

이 질문을 너무 많이 들어서 나는 대본을 만들어놨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입술이 자주 마르는데, 립밤을 자꾸 잃어버려서 목에다 걸고 다니게 됐어요. 이렇게 걸고 다니면 립밤을 1년 동안 다 닳을 때까지 쓸 수 있어요."

이에 공감한 어떤 사람은 내가 목에 건 것과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했다. 나는 몇몇에게 립밤 목걸이를 만들어서 줬다.

립밤을 목에 걸고 다닌 지 꽤 됐다. 15년 정도 된 것 같다. 어느 날 TV에서 히말라야 원정을 떠나는 등반팀 다큐멘터리를 봤다. 어떤 산악인이 우모복 속에서 립밤 목걸이를 꺼내 입술에 발랐다. 누구도 이 장면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유일하게 나만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나도 저게 필요해!'

나는 그것을 따라 하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립밤 목걸이의 여러 버전들. 네 번의 변신을 거듭한 끝에 지금의 목걸이가 완성됐다.

립밤을 목걸이에 고정시키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테이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투명 스카치테이프는 너무 멋이 없었고, 청테이프는 더욱 멋이 없어서 은색 덕트테이프(미국에서 많이 쓰는 만능 테이프. 요세미티 거벽 등반가들에게도 이 테이프는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당시 덕트테이프는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웠다)를 선배한테 빌렸다. 테이프를 립밤에 둘둘 말아 붙여 코드 슬링과 연결시켰는데, 굉장히 지저분했지만 그런대로 산악인 느낌이 나서 마음에 들었다 그것을 한동안 목에 걸고 다녔다. 이걸 본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 내가 목에 걸고 있는 게 립밤인 걸 몰랐다.

"목에 건 지저분한 그거 뭐야? 왜 벌레를 달고 다녀?"

얼마 안 가 나는 립밤에서 덕트테이프를 떼 버리고 대신 흰색 클라이밍 테이프를 감았다. 모양이 더 깔끔해졌지만 이것도 얼마 안 가 때가 타서 새카맣게 됐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목에 건 그거, 빨아서 쓰긴 하는 거야?"

나는 흰색 클라이밍 테이프를 감은 립밤을 버렸다.

세 번째 버전 립밤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오랫동안 목에 걸어도 지저분하지 않아야 하고, 다 쓴 립밤을 새 것으로 교체할 때 작업이 간편해야 했고, 어떠한 모양의 립밤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결국 립밤 끝에 구멍을 내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얇은 송곳을 불에 달군 다음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본체 끝에 구멍을 냈다. 그 구멍에 작은 열쇠고리를 끼웠다! 깔끔했다. 만들기도 어렵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세 번째 버전의 립밤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립밤 목걸이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몇 년 지나니 이것도 꽤 불편했다. 목걸이를 만들려면 라이터와 송곳이 있어야 했다. 나는 이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또 연구했다. 립밤을 손에 들고 몇날 며칠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밤에 잠도 자지 못했다. 별 거 아닌 이것에 나는 목숨을 걸고 싶었다.

'어떤 방법을 쓰면 간편하게 립밤을 교체할 수 있을까? 쉬운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간절했다. 립밤 뚜껑에 고리가 달려 목걸이로 쓸 수 있게 한 제품이 있었는데, 이건 아동용이라서 목에 걸기 창피했다. 나는 그 립밤 말고 '버츠비(화장품 상표)' '챕스틱' '뉴트로지나' '록시땅' 같은 세련된 걸 쓰고 싶었다. 계속 연구했다.

어느 날 집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가 수전에서 물이 새는 걸 봤다. 나는 생각했다.

'여기 수전에 들어간 고무 패킹을 교체해야겠는데?'

얼마 후 수리하는 아저씨가 왔다. 아저씨는 고무 패킹을 꺼내 수전에 갈아 끼웠다. 물이 새지 않았다. 아저씨는 망가진 고무 패킹을 아무 데나 버리고 갔다. 그것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려는데, 동그란 구멍에 립밤이 들어갈 것 같았다. 립밤을 들고 와서 고무 패킹에 끼웠다. 잘 끼워지긴 했지만 고무 패킹 사이즈가 커서 헐렁했다. 이것보다 작은 사이즈의 고무 패킹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고무 패킹의 제품 이름을 몰랐고 어디서 파는지 몰라서 을지로로 갔다. 아무 철물점에 들어가서 물어봤다.

"수전에 들어가는 고무 패킹 있나요?"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무 패킹이 있는 집도 있었는데, 립밤에는 맞지 않았다. 정처 없이 철물점 골목을 헤매다가 을지로3가역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유일특수고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가게로 들어가니 내가 찾던 고무 패킹이 사이즈 별로, 색깔 별로 갖춰져 있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립밤을 꺼내어 적당한 크기의 고무 패킹에 끼웠다. 딱 맞았다! 신이 났다. 주인아저씨께 이것을 달라고 했다. 주인아저씨는 내가 집어든 고무 패킹이 '오링o-ring'이라고 했다. 10개 정도를 봉투에 담았는데 700원밖에 안 했다! 행복했다.

립밤을 오링에 끼운 네 번째 버전의 나의 립밤 목걸이는 이렇게 완성됐다. 그 후로 10여 년간 이 목걸이를 썼다. 립밤을 그냥 갖고 다니면 이것들은 꼭 어딘가로 사라진다. 사라진 줄 알고 편의점에서 구입하면 가방 주머니나 외투 주머니에서 발견된다. 립밤 목걸이는 이런 짜증나는 상황에서 나를 구했다. 진정한 친환경 제품이다. 또 이 목걸이는 나에게 마법 같은 물건이다. 낯선 사람과 어색하게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게 한다. 낯선 사람은 내 목에 걸려 있는 이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와! 그 목걸이 기발하네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모르는 사람과 나는 이런 식으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여자 후배에게 이것을 만들어서 선물로 준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회사에 립밤 목걸이를 하고 갔다가 '어머! 귀여워!'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누군가 나에게 이 목걸이를 쇼핑몰에서 팔아보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만들기가 굉장히 쉽지만 이것을 포장하고 배송하는 데 몸과 머리를 쓰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해봤자 부자가 될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이 목걸이는 유용하긴 하지만 나처럼 매일 목에 걸고 다니기엔 확실히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이 목걸이를 선물 받은 사람 누구도 나처럼 이것을 매일 목에 걸고 다니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이 목걸이의 연구 과정과 만드는 방법을 여기에 모두 공개한다. 이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니면 당신도 '등산시렁 립밤 목걸이 클럽 회원'이다. 대신 제안 하나 한다. 거리에서 립밤 목걸이를 한 사람과 마주친다면 어색해하지 말고 이렇게 인사하자.

"ㅋㅋㅋ 목걸이 예쁘네요!"

오늘도 립밤 목걸이를 목에 걸고 출근한 윤성중 기자.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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