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곳 없는 외국인 노동자] 8.설날 앞 베트남 선원들의 꿈

강주영 2024. 2. 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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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선원 11명과 한솥밥 70대 선장 “베트남 식구들은 보물”
양양 수산항 김승선 선장 숙소
옛 민박집 활용 3년째 동고동락
20∼40대 외국인 선원에 의지
베트남 요리로 식사 당번도
현 선원비자 급여체계 불명확
선주 따라 숙식 등 격차 불가피
한국어 수강 기회 전무 아쉬움
“언젠가 부모님 모셔오고파”
▲ 양양 수산리 숙소에 모여 앉은 김승선 선장이 베트남 출신 선원들과 베트남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 

“오늘 덕분에 밥을 좀 일찍 먹겠어요”

강원 동해안에서 어업에 종사한지 7년 째인 김승선(72) 선장이 부엌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달 31일 오후 4시 양양 수산항에 있는 어촌계 소유의 한 건물. 해물찜 식당이자 민박집이었던 이 건물 부엌에서는 이제 베트남 요리 특유의 향이 풍긴다. 한국인 선장 1명과 외국인 선원 11명, 12명이 함께 사는 집이다. 식사당번을 맡은 꾸엉(29)·휜(32) 선원의 이른 저녁준비가 시작됐다. 이날 요리는 돼지고기 볶음과 돼지국. 삼치구이를 제외하면 모두 베트남식이다. 김 선장은 투숙실 10여개가 있던 이곳에서 3년 전부터 베트남 선원들과 함께 산다. 베트남 선원들의 평균 연령은 20∼40대. 이 일대 어촌계에서 가장 젊다. 김 선장은 “혼자 살고 요리도 못하는데 이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니 좋다. 먹다 보니 베트남 음식도 제법 입에 맞다”며 “떨어진 재료를 사다주는 게 내 일”이라며 웃었다. 12명이 사는 이 집은 이렇게 식사 당번이 돌아간다.

민박을 활용한 숙소는 선원들 간 합의 아래 1인 1실이나 1일 3실을 택해서 돌아가며 머문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방의 크기도 차이가 없다. 김 선장이 사는 호실 이름은 ‘해삼’. 바로 옆 방을 쓰는 티엔 낫 선원은 “선장님 몸이 별로 안 좋아서 내가 도와줘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김 선장이 많이 의지하는 선원 중 한 명이다.

 

▲ 김승선 선장이 번역 앱을 이용해 선원에게 안부를 묻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

김 선장은 65세에 어선을 처음 탔다. 그는 “뱃일을 도울 사람이 없다고 해서 퇴직 후 자격증을 따서 왔는데 몸이 안 좋으니 모든 게 힘에 부친다”며 “나이가 드니 부상도 잦아서 1∼2년 안에는 어선을 팔까 하는 생각도 한다”고 했다. 70대 나이의 선장에게 베트남 선원들은 보물같은 존재다. 박스를 옮기는 것조차 힘에 부쳐 스스로를 “스패어(spare) 선장”이라고 부르는 김 선장은 “이 친구들 없이는 배도 못 나간다”고 했다.

형제사이인 황 티엔 낫(32)·황 반 트엉(25)선원은 이날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이틀 뒤 가족을 만나러 베트남에 가기 때문이다. 휴가는 3월 13일까지다. 어번기가 끝나는 1월 말부터 3월초까지 매년 선원들은 휴가를 갖는다. 11명 중 3명은 이미 휴가로 자리를 비웠다. 생일도 앞둔 티엔 낫 선원은 “베트남도 설날이 한국이랑 같아요”라며 “아내, 딸과 파티를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베트남에서 농사일을 도왔던 형제는 부모님을 한국에 모셔오는 것이 장기적 꿈이다.

 

▲ 양양 수산리 숙소에 모여 앉은 김승선 선장과 베트남 출신 휜·꾸엉·황 티엔 낫·황 반 트엉 선원

이곳에서 일하는 선원들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다. 중·대형(20t 이상) 어선을 타며 월 260∼300만원을 받는 이들은 모두 E10(선원) 비자로 일한다. 법무부의 고용허가제 대신 ‘선원법’과 ‘외국인선원 관리지침’을 적용받는다. 국제 협약을 맺은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권에서 온다. 현재 이 비자로 한국에 오는 외국인노동자의 숙식 제공은 대부분 선주가 부담하지만 명확한 급여체계와 거주 여건 등은 법제화 되어있지 않다.

김 선장은 “방 값과 식비는 다 우리가 내야 한다. 외국인들이 머물 곳이 주변에는 마땅치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행법상 선주가 이들의 숙식제공을 할 의무는 없다. 선주에 따라 거주환경의 차이가 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어업 특성상 날씨가 안 좋은 날도 휴일이 된다. 같은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거나 자전거 등을 타며 휴일을 즐긴다. 트엔 낫 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화를 끊은 그는 “내일 바람 많이 불어요. 배 못 나가요”라고 하자 김 선장은 “그럼 위험하니까 하루 쉬자”고 했다.

이처럼 선주의 배려와 휴가 등으로 일하고 있지만 한국어 교육 등의 인프라는 매우 부족하다. 속초와 양양권에는 이들이 수강할 수 있는 한국어 교실이 없다. 가장 오랜기간 한국에 머문 휜 선원은 아직 한 문장도 구사하지 못해 단어로 소통하고 있다. 김 선장은 “번역어플을 쓰거나 복잡한 소통은 문자로 주고 받는다”고 했다. 한국어 책을 사며 공부에 열정적인 티엔 낫 선원은 “유튜브로 한국어 공부를 하고 글씨도 쓴다”고 했다. 숙련선원 트엔 낫 씨는 한 달에 300만원을 받고 별도의 일이 있을 때마다 20∼30만원씩 보너스를 받는다. 김 선장은 “나도 못받는 보너스를 언제 받았느냐”고 신기해 했다.

설날 계획을 묻자 6년째 한국에서 일해온 휜 선원은 “올해는 집에 안가고 주문진에서 일하는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선원 일을 시작한 꾸엉 씨는 “서울 누나 집에 놀러갈 것”이라고 했다.

김 선장도 설날 만큼은 가족을 만나 쉰다.

강주영 juyo9642@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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