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6>] 기쁨은 변수다. 하지만 권태와 상실은 상수다

박혜진 2024. 2. 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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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커다랗게 원을 그린다. 그런 다음 원 안에 두 개의 선을 그려 넣는다. 이제 원 안에는 세 개의 면적이 생겼다. 겨울방학 생활계획표 같은 형태다. 구역이 나뉘었다면 세 개의 면적에 각각의 단어를 적어 넣어 보자. 권태, 상실, 기쁨. 단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 밑에 조그맣게 부연하는 문장을 적어 넣을 수도 있다. 일상의 권태,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 불행을 감추고 있는 기쁨. 이게 우리 인생의 3분할이라 말하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대체 누가 이따위 원을 그렸냐고 묻고 싶을까. 진작에 알고 있던 진실이라며 맞장구칠까. 일찌감치 고백하건대 이 원은 내가 그렸다. 다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린 건 아니다. 말하자면 안톤 체호프와 협업이랄까. 체호프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내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당신의 판단이 필요다. 내가 체호프를 오해한 것인지 이해한 것인지, 내가 인생을 오해한 것인지 이해한 것인지. 이 글을 읽고 판단해 주시기를. 합리적인 판단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같이 읽을 작품은 체호프의 짧은 소설 ‘티푸스’다. 소설의 끝에서 주인공은 절규한다. “하느님 나는 왜 이리도 불행합니까!” 원의 3분할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면 이 문장의 의미도 드러날 것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티푸스’는 병에 걸린 한 남자의 회복기다. 클리모프라는 남성이 모스크바로 향하는 우편 열차를 타고 있다. 그는 지금 발열 증세로 제정신이 아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끈적거린다. 연기가 뿌옇게 찬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는 죄다 꿈결 같다. 음식은 역겨워 보이고 마주 앉은 사람의 얘기는 들어줄 수가 없다.

고통스러운 열차에서 시간이 끝나고 집에 도착한 그는 숙모와 누이동생의 인사를 받을 새도 없이 침대 위로 쓰러진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의 곁에는 의사가 있고, 혼수상태에서 본 숙모와 동생은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깨어났을 때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과 배는 달콤하고 행복한, 간지럼 태우는 듯한 웃음으로 떨려왔다. 아마도 최초의 인간이 창조되어 처음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느꼈음 직한 끝없는 행복감과 생명의 환희가 그의 온 존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충만하게 채웠다.” 그는 온통 사소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쁨을 느낀다. 아픈 몸에서 회복된 몸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느끼는 이 ‘동물적 기쁨’은 예상치 못한 비극 앞에서도 좀처럼 멈추질 않는다. 웬일인지 누이동생이 안 보인다 싶던 차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동생이 죽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걸린 티푸스에 감염되는 바람에.

“하느님 나는 왜 이리도 불행합니까!” 자신의 불행을 토해 내는 대사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다시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나온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창틀에 이마를 기댄다. 그러고는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왜 이렇게 불행한 것이냐고. 이어지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그의 기쁨은 일상의 권태와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육체적 고통-혼수상태-회복-육체적 기쁨-정신적 고통, 이른바 고통의 5단계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체호프라는 작가가 품고 있는 인생론에 대한 극단적 예시다.

이 소설은 인생에 대해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 기쁨은 일시적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 잠깐 나타날 수는 있지만 금방 사라지기도 한다. 사라진 듯하다 다시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권태와 상실감. 요컨대 이런 얘기다. 기쁨은 변수다. 하지만 권태와 상실은 상수다. 우리는 삶이 정체돼 있을 때 권태를 느끼고 삶이 움직일 때 상실을 느낀다. 권태와 상실감을 없애려 들지 말라. 둘째, 기쁨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마디로 둘은 공존한다. 클리모프가 죽다 살아났을 때 누이동생은 살아 있다 죽는다. 더욱이 감염병에서 회복되며 발생한 육체적 활기가 동생의 죽음에서 오는 정신적 충격을 압도하지 못한다. 인간적 슬픔보다 동물적 기쁨이 더 먼저 발생한다는 사실은 체호프가 어떤 작가인지 말해 준다.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지나치게 차갑다. 그러나 이런 비관 속에서도 우리는 체호프식의 낙관을 읽을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보다 중요한 세 번째 진실이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따라서 원의 3분할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권태와 상실감과 불행을 나란히 놓고 볼 때, 권태도 상실감도 불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권태롭거나 상실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권태는 정체이고 상실감은 역동일 뿐, 다시 말해 하나의 상태일 뿐, 이는 기쁨이나 불행과는 무관하다. 권태롭거나 상실감을 느끼는 건 불행의 증거가 아니다. 더욱이 불행은 뒷면에 기쁨을 감추고 있다. 우리는 불행에 빠질 이유가 없다. 클리모프처럼 하느님에게 대고 원망의 절규를 할 필요가 없다.

[이번 호(526호)를 마지막으로 ‘박혜진의 엔딩노트’는 연재를 마칩니다.]

Plus Point
안톤 체호프

1860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1879년 모스크바대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했고 1882년부터 5년에 걸쳐 유머 주간지에 약 300여 편의 소품을 기고했다. 1884년에 의사로 개업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접어들었으며 검열과 잡지사의 무리한 요구 등에도 불구하고 풍자와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1886년 건강이 악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890년 사할린으로 자료 수집 여행을 떠났고 이태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창작을 계속함으로써 원숙기를 맞이했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갈 때까지 소설 ‘결투’ ‘귀여운 여인’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골짜기에서’ 등과 그의 4대 희곡 중 첫 작품 ‘갈매기’를 발표했다. 1904년 44세의 나이에 병세 악화로 “나는 죽는다(Ich sterbe)”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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